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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소통/소소한 일상

나를 잊지 마세요 - 도덕산에 살던 우리를 기억하세요?

 

나를 잊지 마세요
도덕산에 살던 우리를 기억하세요?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글/사진. 곧미녀(김경애)
Blog. http://blog.naver.com/hvhklove
미녀의 정원



 


예쁜 이름으로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카시아, 소나무, 밤나무.

햇볕 따스한 봄날엔 소풍나온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자장가삼아

낮잠을 자기도 하고,

어느날은 다정한 연인의 속삭임을 옆 나무와 흉내 내보기도 했었지요.





 


비가 오는 날에는 그 나름의 운치를

즐겼습니다.


한번도 마셔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사람들이 우리들 발치에서 마시던

진한 커피향을 떠올리며

내리는 빗방울을 세어볼 수도 있었으니까요.





 


한발짝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우린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예쁜 새싹을 가지끝에 매달고,

조금이라도 진한 꽃이나 초록으로 온몸을 물들이느라

또 최신 유행컬러로 옷을 갈아입고 멋을 내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이야기할 때도 우리는

도토리 한 개를 두고 싸우는

다람쥐와 청솔모를 말리거나

시도때도 없이 어깨 위에서 볼일을 보는 산새들을 혼내주느라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찬바람에 무릎이 시리거나

알록달록한 외투가 바람에 힘없이 벗겨져 내릴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겨울이 와 있음을 느끼곤 잠깐씩 슬픔에 빠지곤 했어요.



그러나 그 시절

슬픔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을 바람을 좋아했습니다.

여름내내 달콤했던

아카시아 향을 머리 끝에 매달고

가을 바람은 온 산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지요.

시끄러워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우린 가을 바람이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향기롭고 아름다운 날들이 흐르며

우리의 모습은 변해갔습니다.






 


이마의 주름살이 깊어지더니 이내

우리들 가슴팍에 바람이 시리고 아프게 스며들어왔습니다.


그러다

살갖이 조금씩 볏겨져 떨어지더니 여름날에도

아카시아 나무는 더이상 향기롭지 못했고,

밤나무에는 밤송이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밤나무가 시린 무릎때문에 밤새 뒤척일 땐

모두 제 일인양 안타까워 했지만, 눈물조차 흐르지 않을만큼 늙어버린 우리는

가슴으로만 울어야 했답니다.



그렇게 아픈 시간이 우리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어느날 아침,

요란한 기계음에 눈을 떴을때 우리는 너무도 슬픈 현실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를 나눌틈도 없이

아카시아 나무와 상수리 나무의 밑둥이 잘려나갔고

다람쥐, 청솔모, 뱀이랑 개미들...

그리고 비둘기와 작은 새들까지 모두 도망쳐버린 아침.


무서운 톱날은 도덕산 능선을 타고다니며

거칠게 우리 몸을 조각내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온 몸을 화려하게 수 놓기도 하고

삶에서 오는 지혜로움으로

작은 나무들을 이끌어주며 행복해 했던

그런 날들이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슬프고 아픈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이젠 잘라진 내 밑둥에서

누군가 지친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을테니까요.


그는

등산객이어도 좋고, 들고가는 도토리가 무거운

다람쥐, 혹은 비탈길에서 굴러오는 돌맹이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조금 느려질 수 있다면

잘려져 밑둥만 남은 지금 내 모습에도 나는

행복할 수 있을테니까요.





 


낮은 자세로 당신을 기다리는

우리를 잊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