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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소통

[미니인권강좌] 인권감수성-누가 장애를 이야기 하는가?

 

 

 

장애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이 질문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7월 9일 오전 10시.

나름청소년문화의집에서는 광명시 시민인권센터에서 주최한 미니인권강좌를 듣기 위해

인권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성찰을 하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표정들이 진지하다.


온화한 인상을 가진 인권교육 온다(온DA)의 이세훈 활동가의 강의로 강좌는 시작된다.

강의는 연설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들을 나누는 '나눔'이어야 한다는 이세훈 활동가의

강의 철학에 따라 수강자들은 모두 참여식 강의를 위해 대 여섯 명씩 조를 이루어 자리에 앉았다.

 

 

 

강의실 앞쪽에 제시된 5개의 동화들(효녀 심청, 혹부리 영감, 백설 공주, 인어공주, 피터팬) 중 하나를 각 조가 선택하고 동화에서 나타나는 인권 침해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으로 수업은 시작되었다.

 

 

 

3개의 조가 선택한 동화는 각각 백설 공주, 인어공주, 심청전.

즐겁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토론을 통한 시민들의 눈으로 찾아낸 동화 속

인권 침해 적 요소는 이러했다.


 

 

백설 공주에서는 권력의 힘으로 누군가를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행위와

장애인들(일곱 난쟁이)이 당연하게 일반 사회와 격리되어 있는 모습들이 나타나 있었고,

 

인어공주에서는 같은 인격체이지만 일반인(비장애인)과 조금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인어들(장애인)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회적 구조의 모순이 보였고,

사람(비장애인)이 되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마치 엄청난 신분상승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양 너무나 큰 대가(목소리를 잃어야 하는 등)를 치러야만 가능한 것으로

묘사된 차별적 시선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효녀 심청에서는 시각장애인 심학규를 위한 사회시스템이 전무하고 시각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인해 타인의 도움 없이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져 있었다.

 

 

 


 

 

또한, 5개 동화에는 모두 장애인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이세훈 활동가의 설명으로 비로소 인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접해 왔던 너무나 유명한 동화 속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애인에 대한

인권 침해적 요소가 무척이나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위 동화들처럼 우리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장애나 혹은 장애인에 대해 당연한 듯

잘못된 편견과 오해의 시선을 보내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현주소를 가벼운 토론을 통해 인식하는 과정을 거친 후

강좌의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갔다.

'장애인'이라고 하면 당신은 어떤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동정, 봉사, 극복... 오늘 수업에서는 이 3가지 단어를 짚고 있다.

장애는 동정의 대상인가? 봉사해야 할 대상인가? 극복해야 할 문제인가?

답은 간단하다. 모두 '아니오'다.


장애인들은 동정 받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저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불쾌해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장애가 나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 적이 없는데도 당신은 혹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불편함에 불쾌함까지 얹었던 적은 없는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문턱이 없는 건물을 짓는 것이

그들을 위한 '봉사'가 아닌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당연한 배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구분해서 공중화장실 시설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위한 모든 조치들을 '대가 없이 베풀어 주는' 봉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장애인이 장애가 있다는 사실에 불편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서 평범하게 성실한 삶을 사는 것은

비장애인들이 평범하지만 성실한 삶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례를 접하며 감동하고 그런 사람만을

진정으로 장애를 극복한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긴 적은 없는가?

 

 

 

 

 

 

강의는 이쯤에서 스웨덴의 예를 보여준다.

세계에서 사회복지가 가장 잘 이루어진 나라로 알려진 스웨덴의 한 시각장애인 어린이가 등장하며, 학교에서의 생활이 보인다.

시각장애인 학교가 아니라 일반 학교에서 비장애인 어린이들과

똑같이 교실에서 수업도 듣고, 체육도 한다.

다만, 장애로 인해 수업을 따라가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한 보조교사가

이 아이와 함께 내내 학교생활을 함께 한다.

장애인 아동 한 명을 위해 배정된 전담 교사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비장애인과 함께 학교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비장애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은 이처럼 '모든 사람은 같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방침으로

분리 교육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도 매우 소수의 학생만 수용이 가능한) 맹인학교, 농아학교 등등...이 있어

교육을 받는 단계에서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을 뚜렷이 해 두는 우리나라로서는

참 많이 낯선 풍경이고 또한 부러운 풍경이다.

스웨덴에서는 이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굳이 분리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스웨덴에는 장애인 등록제도가 없다고 한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특별한 취급을 받아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강의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프랑스 전력청의 공익광고를 보여준다.

한 젊은 여인이 관공서에서 뭔가를 물으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수화로 대화한다.

수화를 모르는 이 여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도서관의 책들은 모두 점자로 쓰여 있고, 공중전화 부스는 휠체어를 탄 사람들의 높이에 맞추어져

있어 휠체어를 타지 않은 사람들은 몹시 불편한 자세로 쪼그려야만 전화를 쓸 수 있다.

 

 

 

 


 

이 동영상을 보면서 나는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장애에 대한

폭력의 실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광고에 등장하는 비장애인은 광고 안에서는 소수의 비주류인이다.

소수라서, 비주류라서 그 사람에 대한 사회의 시스템적 배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광고 안의 비장애인에게는 사회의 생활시스템 전체가 폭력이고 무관심이다.

사회조직이 특정한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면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불이익을 받으며 살아야 하고 활동의 제약은 불가피해진다.


우리는 현재를 사는 여성과 흑인을 장애인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의 참정권이 주어지기 이전의 세상에서 살던 여성, 노예 신분이 아닌

흑인이 존재하지 않던 미국 땅에서 살던 흑인들은 모두가 현재 이 땅에서 사는

장애인과 다름없는 사회적 불이익과 활동의 제약을 심하게 받아야 하는 삶을 살았다.


진정한 장애는 사회 구조 속에서 태어나고 있으며, 사회적 관계가 장애를 규정짓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독자들에게 질문하려 한다.

장애란 무엇인가?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있는 상태?


현명한 독자라면 이미 이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았을 것이다.


위 스웨덴의 한 시각장애인 어린이를 통한 예와 프랑스 전력청 광고의 예에서 우리는

장애란 결국 사회 구조의 문제이고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다시 쉽게 예를 들어보자.

학교에서 아무런 불편을 겪지 않고 즐겁게 생활하는 스웨덴의 시각장애 어린이와,

좌우 시력이 0.3 정도인데 안경을 살 돈이 없어 학교에서의 수업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한국의 어린이가 있다면 이 중 누가 진짜 장애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사회의 시스템이 어떻게 갖추어져 있느냐에 따라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장애를 대하고 느끼는 것의 한계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눈이 나쁜 사람들은 안경을 쓰는 순간부터 장애인이 아니다.

사회생활 또는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 전혀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경을 착용한 사람이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사회적 시스템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그럼으로 해서 비장애인의 한계가 그만큼 넓어진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운동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스웨덴의 시각장애인 소년은 이미 그 사회 안에서 장애인이 아니다.

스웨덴의 사회 시스템에서 그 소년은 시각장애로 인한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이익을 없앰으로써 행동의 제약 또한 사라졌다.

그를 옭아맬 '장애'가 사라진 것이다.

 

잘 갖추어진 사회의 구조적 시스템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와 구분을 허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는 더 이상 장애인을 동정할 필요도 없고,

장애인에게 특별한 봉사를 할 필요도 없고,

 장애를 극복하려고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나와 외모가 좀 다른 다양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인 것이다.


위 스웨덴의 시각장애 어린이의 이야기를 취재한 취재원이 스웨덴 관계자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스웨덴에서 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에는 무엇이 있나요?"

한참을 고민하던 관계자가 한 말은 뜻밖에도

"장애인이 가질 수 없는 직업은 무엇인가요?''

였다.


장애를 바라보는 비장애인 사회 구성원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답이다.

 이들에게 장애는 이미 장애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장애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만이 장애를 말하고 있고,

장애를 규정짓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이번 강의는 계속해서 나에게 질문한다.

'장애란 무엇인가?' 그리고 '장애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지금까지 장애와 장애인을 규정짓던 내 스스로의 기준에 심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반가운 일이다.

오늘의 강의는 적어도 내게는 성공적이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질문한다.

장애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여전히 온전치 못한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장애는 여전히 당신의 마음속에서 시작하고 있다.



 

 



장애는 신체적 손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거의 또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사회활동의 주류적 참여로부터 배제시키는

당대의 사회조직에 의한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약을 말한다.


영국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 연합 (UPIAS)]


위 문장은 영국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 연합 (UPIAS)]의 장애에 대한 정의다.

당신은 위 정의에 동의하는가?



 

 

 



 

 


<인권교육 온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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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카라반(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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