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느낌 소통/광명여행

설원에 잠든 검질긴 아픔- 겨울 오후, 비운의 여인 강빈을 만나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올 겨울. 오늘은 모처럼 하늘이 맑고 깨끗해 푸근하다. 이런 날에는 집에만 있을 수 없어 차를 몰고 집을 나선다.

 

 

 

 

 

먼저 광명사거리에서 광명IC방향으로 쭉 가다가 온신초등학교가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했다. 좌회전을 한 후,  밤일 마을로  올라가는 길로 가다보니 오른쪽에 저수지가 보인다. 한티고개를 오르기 직전,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국가사적 제 357호 영회원'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모든 세상이 포근하게 눈으로 덮인 날, 소현세자빈의 아픈 사연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영회원으로 들어갔다.

 

영회원은 소현 세자빈 강씨가 잠든 능원이다. 소현 세자빈은 세자빈(世子嬪)였지만 졸지에 남편을 잃고, 여섯 아이의 어머니로 30대 초반에 시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친정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그리고 어린 세 아들마저 귀양길에 올라 두 아들을 잃은 어미였다. 그렇게 소현 세자 빈은 폭풍한설보다 더 맵고 차게 죽어 갔다.

 

 

여기서 잠깐 영회원(永懷園)에 대한 간략히 알아보고 가자.

 

국가사적 제 357호 영회원

 

영회원(永懷園)은 조선조 제16대 인조의 원자인 소현세자 빈 강씨(1611~1646, 민회빈)가 잠든 능원으로,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에 위치하고 있다.

민회빈은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에 소현세자와 볼모로 갔을 때 진취적인 기상과 지혜로운 처신으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며 조선 궁궐의 여성상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왕실을 저주한다는 모함을 하여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44년(1718년)에 죄가 없음이 밝혀져 다시 복원되고 ,고종 7년(1903년)에는 무덤을 '영회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출처:위키백과

 

 

 

 

영회원으로 들어 가는 길, 편도 2차선 도로에서 내려 작은 농로로 들어서면 눈으로 덮인 애기능저수지(현 안터저수지)를 만날 수 있다.
 
가까운 곳에 애기능(영회원)이 있어서 이름 붙여졌다는 애기능저수지으로 지도상에는 노온사지로 표시되어 있다.
애기능저수지는 추운 날씨로 인해 고기를 낚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빛을 받아 반짝이는 흰 눈이 더욱 아름답다.

 

그럼 ‘애기능'이란 어떤 능(陵)을 말하는 것일까?

 

옛사람들은 큰 무덤을 능(陵)이라 불렀다. 그 중에서도 임금의 능보다 조금 작으나 일반인들의 무덤보다는 큰 무덤이 애기능으로 불렀다.

 

강빈(姜嬪)의 묘소를 애기능이라고도 부른 것이었다. 처음 소현 세자빈이 죽음을 맞았을 때에는 아무도 돌보는 이 없어 보잘 것없는 묘였으나, 숙종 이후 복원되었기에 제대로 된 묘를 쓸 수 있어 이곳 민초들에게 능으로 보였을 것이다.

 

 

 

 

 

영회원(永懷園) 표지판이 보인다. 애기능저수지를 지나 농장을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이런 안내판이 길을 안내했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갈라질 때마다 이런 안내판이 있었다면 영회원을 찾기가 더욱 편리할 것 같다.


그런데 소현세자 빈인 강씨의 묘가 왜 여기에 있을까?

 

강씨는 금천강씨로 이곳 아방리(현 노온사동)에 친정이었다. 서인의 신분으로 사사된 강씨는 친정 금천강씨 묘역에 장사되었다.

 

'소현세자가 살아 왕이 되었으면 강씨는 왕비가 되어 호화로운 무덤에 묻혔을 텐데, 안타깝게 친정동네에 이름 없이 묻혔구나!'

이런 마음이 들어서일까 날이 푸근해졌다고는 하지만 눈 위로 불어 오는 바람 끝이 더 차갑게 느껴진다.

 

 

 

 

영회원의 마지막 표지판이 있는 곳에는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가 영회원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다. 400년이라면 세자 빈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느티나무는 세자빈이 복원되어  영회원이라는 이름을 단 것도 모두 알고 있단 말이다.

 

진정 이 느티나무가 산 증인인데 말이 없구나!     

 

 

 

 

구름산 자락에 자리한 영회원의 진입로는 눈으로 가득하다. 날씨가 추워 다녀간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영회원을 다녀간 사람들인가? 아니면 구름산을 다녀 간 사람들의 발자국인지....

어쨌거나 능 주변에 사람의 발걸음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재작년, 겨울 초입에 영회원을 찾았을 때에는 능을 찾은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오늘은 철조망에 꽂아 놓은  꽃이 사람이 다녀갔음을 말해준다.


다행이다. 서럽게 죽음을 맞은 것만으로도 안타까운데, 죽어서까지 잊혀져가는 소현세자 빈을 찾아 묵념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능을 둘러친 철조망 때문에 사진을 찍기가 어렵다. 철조망을 따라 능 뒤로 올라가도 사진을 찍을 만한 곳이 없다.

 

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밟고 올라서서 찍어 본다.

 

반쯤 눈으로 덮인 능은 겨울 오후 햇살이 반짝인다.

 

 

 

 

 

능에는 봉분, 혼유석, 문인석, 석마, 석양, 석호 등이 있으나  비석과 정자각은 남아있지 않다. 소현세자 빈인 강씨가 왕비로 남았으면 다른 능처럼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이 위용을 뽐냈을 텐데...

 

그렇다면 왜 소현세자 내외는 인조의 미움을 사 죽게 되었을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 부부는 청인(淸人)들에게 소군(小君: 작은 임금)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인조의 노여움과 불안감은 커져 갔다. 인조의 눈에는 세자 내외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가 아니라 청나라를 뒤에 업은 강력한 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9년의 볼모를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환대를 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섬뜩하다. 소현 세자빈 강씨의 능에서 정치의 탐욕스러운 속성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현재 영회원은 철로된 울타리가 쳐져있어 들어가지는 못한다.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은 좋지만 외관상으로는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좀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영회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은 소현 세자빈의 회한이 서린 동산은 들어가는 진입로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개인의 농장을 거쳐 들어가야한다.

 

그리고 세자빈은 죽어서도 철조망에 갇혔다. 영회원은 지금도 회한을 품은 동산이다.

  

가까이 가서 석물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지만 자물쇠가 채워진 영회원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영회원을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000으로 연락하세요.'라는 작은 안내문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가까이서 보지 못한 섭섭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길.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위에 나의 발자국도 새기고 돌아 온다. 이 발걸음이 하늘에서 소현 세자빈이 조금이라도 덜 외롭다고 느끼게 했으면 좋겠다.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옷깃을 여며야만 하는 날씨.

 

영회원을 내려오는 길은 길게 눈 덮인 길이다. 소현 세자빈의 슬픈 이야기를 느끼고 오는 길이라  눈 내린 길이 더 운치있게 느껴진다. 이열치열을 이한치한으로 경험해 본다. 추운 날씨에 더 쌀쌀하고 추운 이야기로 추위를 달래보는 것이다.

 

 

 

 

 

 구름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덕분에 한적했던 길을 덜 심심한 발걸음으로 찾은 겨울 오후의 영회원.

 

눈 녹은 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면 하며 길을 내려온다.

 

 

 

 

 

 

영회원을 돌아 애기능저수지로 내려 오는 길에서 바라 본 구름산은 여전히 슬픈 소현 세자빈을 품은 영회원을 안고 의젓하다. 겨울 철새들은 영회원의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전하겠다는 것처럼 무리지어 날아간다.

 

관련 소식: 오는 2월부터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에서 영회원을 직접 관리한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 보기 (클릭시 이동)

 

 

 

글·사진 | 렌즈로 보는 세상(김분호)

온라인 시민필진 2기

Blog http://blog.daum.net/helim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