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느낌 소통/광명동굴

100년 만에 열린 타임캡슐 - '광명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 출판기념회에서 가학광산을 읽다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산 17-1번지 광명가학광산동굴을 혹시 알고 있는가?


100년 전 만들어진 이 동굴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베일에 쌓여있던 광산의 100년 역사를 담은 타임캡슐이 2012년 10월 13일 오후 5시 열린다고 한다. '광명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가 시작되는 그곳으로 지금, 함께 가보자.

 

 

 

 

 

 

2012년 10월 13일, 시민필진 곧미녀는 광명가학광산동굴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이 날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주소를 처음 알게 되었고, 광명가학광산동굴과 처음으로 마주할 기회를 가졌다.

 

 

 

 

 

 

바로 이 곳에서 광명가학광산동굴 100년의 시간을 담은 책의 출판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게 된다.

 

 

 

 

 

 

주말인데다가 여러 행사가 겹쳐있는 날이라 그런지 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또 '광명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 책자의 무료배부에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여기저기 다양한 모습으로 책자를 읽고 있는 사람들.

 

 

 

 

 

 

책 배부하느라 고생 많았을텐데도 활짝 웃고 있는 홍보실의 꽃 '청년 잡스타트'들. 머리에는 햇볕을 막기 위한 모자를 쓰고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광명 소식지로 접은 것이다. 이건 간접홍보? 홍보실에서 일하면서 이미 홍보맨들이 다 되었나 보다. 

 

 

 

 

 

 

살짝 한적해진 틈을 타 나도 책 한권 받았다.

 

 

 

 

 

 

관람객들이 동굴 탐험을 하러 출발하고 있다. 출판기념회가 시작하기 전에 서둘러 따라 들어가본다.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곳은 광명가학광산동굴 제1동공. 흔히들 생각하는 화려한 출판기념회가 아닌, 동굴 깊은 곳에 위치한 '동공'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동굴 깊숙히 들어가다 보니, 저 멀리 희미하게 입간판이 보인다.

 

 

 

 

 

 

생각보다 좁은 입구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넓은 광장이 나타난다.

 

 

 

 

 

 

출판기념회를 위해 많은 시민들과 내빈들이 참석하였다. 시청 홍보실장님이 간단한 인사말씀을 하시고,

 

 

 

 

 

 

가학광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를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샌드아트 공연을 시작으로 출판기념회의 막이 올랐다.

 

 

 

 

 

 

광부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도 가졌다.

 

 

 

 

 

 

시장님의 발간사가 끝난 후,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산 증인이신 성영수님(83세)의 가학광산 회고사가 이어졌다. 어르신의 흥미진진한 옛이야기는 출판기념회에 모인 사람들을 순식간에 1940년대로 데려간 듯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가학광산에서 일을 하셨다는 성영수님. 광부들의 사소한 일상이야기부터 석탄을 캐며 힘들었던 상황까지… 한 번 시작된 성영수님의 가학광산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성영수님께선 가학광산에서 일했던 자신이 죽고 나면, 누가 이런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겠느냐며 끊임없이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셨다. 비록 길고 긴 이야기에 아이들은 어느덧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했지만, 이 날의 분위기 만큼은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라 믿는다. 성영수님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정해져 있던 탓에 아쉽게도 이야기를 중간에 끝내야만 했다.

 

양기대시장님께 가학광산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당부하시던 성영수님. 우리에게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옛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해주고 싶어 하는 노 광부의 마음을 생각하니, 순간 곧미녀의 마음도 숙연해졌다. 출판기념회에는 성영수님과 함께 가학광산에서 기계수리공으로 일하셨던 장원화(85세)님도 참석해주셨다.

 

 

 

 

 

 

변화하는 광명가학광산동굴의 현재와 희망이 담긴 미래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상영되었고,

 

 

 

 

 

 

 ‘광명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의 출간을 축하하는 떡케이크 커팅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단체 및 개인별로 기념촬영을 하며 출판기념회는 끝이 났다.

 

 

 

 

 

 

광명시만의 뜻 깊은 동굴 속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바깥세상으로 향하는 길.

 

 

 

 

 

 

조상들께서 남겨주신 광명가학광산동굴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후손으로서, 곧미녀는 손에 들린 책 한 권이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그 무게를 간직하며, 필진 곧미녀는 '광명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 속 숨겨진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 (아래 내용은 '광명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 책자에서 발췌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시작

 

일제강점기였던 1912년, 가학광산은 ‘시흥광산’이라는 이름으로 공식광업권이 등록되었다.(2005년 광명시가 펴낸 <정책개발 사례집>에 따름) 1993년엔 이이다 큐이치로라는 일본인의 소유가 되기도 했던 가학광산은 당시 시흥군 서면 가학리의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생산했던 광물은 금, 은, 동, 아연 이었으며,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총 길이는 약 7.8km이다. 높이는 1.5m에서부터 4m에 이르는 곳도 있다. 동굴 내부는 바닥을 제외한 벽과 천장이 모두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때문에 다른 광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장을 받쳐주는 커다란 버팀목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이야기

 

광명가학광산동굴 갱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커다란 광장이 나타난다. 이 곳은 '동공'이라고 부르는 곳으로서, 위아래 층으로 통하는 연결통로가 뚫려 있어서 광산 내의 허브 역할을 했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광부들의 휴식공간이 되기도 했고, 작업 지시를 주고받던 간이 현장 사무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광산 내부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릴 때 광부들의 대피소로 이용되었던 이 '동공'에는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폭격을 피해 광산으로 피신해 있던 주민들 중 한 임산부가 아이를 낳았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또, 동굴 천장의 반짝이는 조각들을 하늘의 별자리처럼 여겨 '오누이 별자리'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광명(光明)이라는 지명이 '해와 달이 다른 지역보다 잘 비친다'는 뜻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전래동화 '해님 달님'이 가학광산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도 한번쯤 해 본다.

 

 

 

 

 

가학광산의 사람들

 

처음 시흥광산으로 문을 열 당시, 광부들끼리는 광산을 도고내광산이라 불렀다. 주로 선반의 쇠를 깎는 일을 했다는 장원화(85세)님의 첫 월급은 6천원 정도였다고 한다. 광산 임부들이 3,4천 원 정도씩 받았으니, 그나마 많이 받은 편이었다.장원화님의 기억 속 옛 광산의 모습은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과거에는 6백 명 정도의 인부들이 일하는 규모가 큰 광산이었다고 한다.

 

 또, 광산에 다니던 남편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광산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설순금(92세)님. 특히, 책 속에서 설순금님이 '간드레 불'을 들고 광산으로 출근하던 그 모습은 옛날 어머니들의 따스했던 정을 떠오르게 한다.


광맥이 있는 곳에 착암기로 구멍을 뚫고, 그곳에 다이너마이트를 넣어 발파하는 작업을 직접 담당했다는 이종묵(77세)님. 갑자기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사망한 사람도 있을 정도로 광산 일은 무척이나 힘이 든다고 한다. 화약을 다루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는 이종묵님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부락 사람들 모두 가학광산으로 피신해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가학광산을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책 속에서 금맥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아픔

 

일반적으로 광산이 폐광을 하는 이유는 점차 채굴량이 줄어들면서 채산성이 맞지 않아졌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학광산의 경우, 뜻하지 않은 일로 갑작스레 폐광이 되었다.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1972년 발생한 대홍수 때문이었다. 1972년 8월 17일부터 20일까지 서울과 중부 지역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태풍 '베티'로 인해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이 때 내린 집중폭우로 가학광산의 광미(鑛尾)가 도고내 일대의 논과 밭, 하천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가 버렸다.

 

기본적으로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광산에서 캐낸 암석에서 금, 구리, 아연 등 유용한 물질들을 빼면 돌가루 찌꺼기인 광미만 남는다. 이 광미에는 미량의 중금속이 남아 있는데, 공기 중에 날릴 경우 사람이 이를 들여 마실 위험이 있다. 나아가, 광산의 배수나 빗물 속에 중금속이 포함된 경우 주변 하천을 오염시키게 된다. 광미 유출로 도고내 주민들이 입은 피해액은 당시 금액으로 대략 800만원이 넘었으며, 토양과 하천의 중금속 오염은 그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남겼다.

 

하루아침에 마을의 재앙이 되어버린 가학광산. 피해보상에 대한 부담과 비난여론 때문에 당시 가학광산을 운영하던 경방산업(주)은 결국 광산의 문을 닫고 말았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추억

 

이후, 수도권 최대 규모의 금속광산이었던 가학광산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문을 세웠고, 1972년 폐광된 이후엔 가끔 오가는 광산 주인을 제외하곤 인적이 끊어졌다. 가학동 주민들이 무더운 여름밤을 견디기 위해 서늘한 바람이 틈 사이로 나오는 동굴 앞에서 고기를 구워먹거나 수박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고, 누구도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광명가학광산동굴이 새우젓을 숙성시키는 동굴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내부의 온도가 일 년 내내 12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새우젓 숙성에 딱 알맞은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소래포구에서 잡힌 새우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숙성이 되었으며, 한창 일 때는 일 년에 3천여 통의 새우젓이 광명가학광산동굴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2011년 양기대 시장과 관계자들이 처음 광산을 방문했을 당시까지도 광명가학광산동굴에서 새우젓이 숙성되고 있었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의 발견

 

2011년 1월 26일, 전 광산소유주 김기원씨로부터 광명시가 광명가학광산동굴 공원부지를 매입함으로써 가학광산은 폐광된 지 40년 만에 광명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수도권 유일의 금속 폐 광산인 광명가학광산동굴을 세계적인 동굴 관광지로 개발할 수 있는 길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광명시는 광산 부지 매입과 동굴 내부에 대한 안전 진단에 이어 기본 용역을 추진하면서, 광명가학광산동굴을 개발하기 위한 박차를 가했다. 2011년 2월, 양기대시장은 동굴 관광 사업에 대한 국내의 현장 사례들을 시찰했고, 다음 달인 3월 15일에는 미국 서부지역의 자연 동굴과 광명광산동굴 개발 사례를 공부해, 캘리포니아 사막에 위치한 캘리코 광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광명시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2011년 8월 22일 광명가학광산동굴은 드디어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초대

 

1차 개방을 시작한 광명가학광산동굴은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두 차례,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탐방이 가능하다. 개방을 시작한지 두 달 만에 방문자 1만 명을 돌파한 광명가학광산동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 임시 개방 상태에서도 매우 이례적으로 시민들의 높은 관심과 호응이 있었다고 한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장관에 대한 입 소문을 듣고 동굴을 찾아 온 관광객이 날마다 줄을 서고, 북한 이탈 주민, 초등학생, 인터넷 걷기 카페 회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광명가학광산동굴을 찾고 있다.

 

앞으로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서두르지 않고 미래의 청사진을 차근차근 짠 후 광명시의 랜드마크로 키워날 것이라는 양기대시장. 시장님의 이런 바람을 알기라도 한 듯, 2011년 10월 26일, 인기 애니메이션 '뽀로로'제작사인 (주) 오콘에서도 가학광산 테마 파크 사업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2011년 10월 31일에는 광명가학광산동굴에서 처음으로 동굴 음악회가 열렸다. 공연단은 100년이 된 동굴 속을 금관악기의 화음으로 가득 채웠고,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별도의 음향장치 없이도 멋진 공연을 선보였던 신영희 명창은 놀랍고 기쁜 경험이 었다며 감동의 순간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 광명가학광산동굴은 세레나데에 맞춰 연인에게 프러포즈로 사랑을 전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언약의 순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감동의 순간, 항상 시민과 함께 하는 오랜 친구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의 미래

 

광명가학광산동굴이 개방 된지 일 년 만에 방문객 4만 명을 돌파했다.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의 광명가학광산동굴의 잠재적 가치에 시 안팎의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얼마 전 경기도 내 투자 유치 유망 관광지로 선정된 광명가학광산동굴은 이제 광명시와 경기도를 넘어 국가적 차원의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폴란드 소금광산의 성공사례처럼, 광명가학광산동굴은 이제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시행착오를 줄여가며 지역주민들의 공감대를 확산시킬 수 있는 개발이 필요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하는 양기대 시장의 말처럼, 광명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광명학광산동굴은 '창조'의 공간이다. 광명의 새로운 미래가 100주년을 맞이한 이 동굴에서부터 펼쳐질 수 있도록, 시민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의 100년 역사를 '기억'하고 광명가학광산동굴의 밝은 내일에 큰 '의미'를 새기는 첫 걸음, 광명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 출판기념회. 100년의 이야기가 담긴 타임캡슐은 열렸다. 그 속에서 나온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조합해 나갈 것인지는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앞으로 가학광산이 들려줄 수많은 이야기들 중,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광명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가 필요하신 분은 광명시청 홍보실로 방문해 주세요.


 

 

 

 

 

| 곧미녀(김경애)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1기

Blog http://blog.naver.com/hvh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