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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소통/소소한 일상

한 편의 詩를 닮은 기형도기념사업회 송년회 - 입 속 한가득 詩 향기

 

 

입 속 한가득 詩 향기
한 편의 詩를 닮은 기형도기념사업회 송년회

제1기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곧미녀(김경애)
Blog. http://blog.naver.com/hvhklove
미녀의 정원


며칠 전, 기형도 시인의 詩길 밟기 행사때 뵈었던 양철원 학예사님으로부터 반가운 전화를 받았어요. '기형도기념사업회'의 송년회에 곧미녀를 초대하시겠다는 전화였죠.

보통 송년회하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분위기일 것이 뻔하잖아요. 그냥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맛있는 저녁 시간을 가져보자는 생각으로 곧미녀는 집을 나섰습니다.


 

12월 어느날 저녁, 모임 장소인 한 식당에 도착한 제 눈에 제일 먼저 띈 것은 짧은 詩귀절이 씌여진 달력이었어요.

지인에게서 선물받았다며 자랑하시던 양 학예사님.
그리고 그 달력이 부러운 곧미녀는 눈으로 달력에 쓰인 詩를 읽어봅니다.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유난히 무거웠던 나무탁자를 움직여 아직 오지않은 회원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두고 인사를 나눴어요.
회장이나 대표가 따로 있지않다는 기형도시인 기념사업회. 자유로움이란 이런걸까요?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곳 대표메뉴라는 누룽지탕이 나오고 모임에 회장이 없는 것처럼 송년회도 역시 특별한 인삿말도 없이 시작되었어요. ^^





 


송년회, 첫 미팅순간처럼
….

담소 중에 기다렸던 회원들이 속속 도착했는데, 그 중에는 기형도 시인의 작은 누이도 계셨어요. (양철원 학예사님 오른쪽)

정식으로 회원들의 자기소개시간.
초창기 회원부터 처음 나온 신입회원까지 첫 미팅때처럼 설렘의 자기 소개를 하는 동안, 다들 얼굴 가득 미소가 끊이질 않았어요. 반갑고 즐거운 마음은 쉽게 전염되는것 같아요. 막걸리 한 사발로 반가움을 대신합니다. 모두 모두 반가워요~
 



송년회, 시상식처럼
….

 

누룽지탕 몇 수저, 막걸리 몇 모금 마셨을 시간이 흐르고 양 학예사님이 시상식을 하신다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셨어요. ㅎㅎ 바로 한 해 동안 수고해 주신 분들께 책을 선물하는 자리였지요.

구라상, 들보상 등등. 詩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다운 신선한 시상식이죠?
책을 받은 회원들은 책장을 넘겨보고, 글을 읽어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네요. 시집을 살짝 열어볼까요?



 
송년회, 시낭송 발표회처럼
….

사무원 - 김기택

이른 아침 6시 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의자에만 앉아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생략.........


 



너무 많은 입 - 천양희

재잘나무 입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댄다 잎들이 많고 입들이 너무 많다

이 시인은
마흔살이 되자
나의 입은 문득 사라졌다
어쩌면 좋담. 이라 쓰고 있다
........생략........




 

넘쳐나는 詩어들 속에서 나는 마치 시 낭송대회에 온 듯 했어요.

시와 함께 음식들이 하나 둘 입으로 사라지고 기형도 시인의 이야기가 안주처럼 상 위에 올려졌어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모임이라는 기형도 기념사업회는 어떤 단체나 기관의 도움없이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무의 수사학" 제가 받은 시집입니다. 기형도 시인 알리기에 도움을 주었다며 주신 상이랍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활동하라는 뜻인것 같은데 쪼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책을 펼쳐봅니다.


가슴에 묻은 김칫 국물 - 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 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생략..............




송년회, 생일파티처럼
….

 

제가 선물에 눈을 팔고 있는 사이, 다른 회원이 준비해 온 선물이 또 돌려졌어요. 와~ 책갈피네요~ 요즘 책 읽는 사람들도 생소할 그런 소중한 선물이에요.

각각의 책갈피에는 좋은 글귀가 적혀있어 받은 사람이 낭독을 하는 시간도 가졌어요. 작은 책갈피하나에도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일을 맞은 듯 또 그렇게 행복해 합니다.

우연일까요?
회원중 12월 결혼하시는 분이 받은 책갈피 내용이 모두를 웃게 하네요.


낙화 -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송년회, 동창회처럼
….

 

시상식에, 책갈피 선물에, 시간은 소리도 없이 흐르고 차려진 음식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느덧 송년회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들로 꽃피워지고 있었어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풀어놓는 옛 이야기들이 끝날 줄 모르네요.



 

 

먹음직스런 묵은지 닭볶음탕이 나오고 사발에는 처음인 양 다시 막걸리가 가득 채워지네요.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기형도 기념사업회 카페에서 사용하는 각자의 닉네임을 기형도 시인의 詩에서 찾아보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생각해보니 참 좋을거 같네요. 멋진 닉네임들이 나올거 같죠?

모두 동의하는 사이 안개, 빈집, 윗목 등은 벌써 주인이 생겼어요. 시인의 사람들은 참 빠르기도 하네요.




송년회, 사인회처럼
….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치룬 듯한 송년회가 2시간쯤 흘렀을까요?
이금미 회원이 시집을 발간했다는 말을 하자 회원들의 축하가 쏟아지네요. 축하합니다~

이금미 시인은 광명시 문예사업의 일환으로 시집 발간을 지원받았다고 해요. 시집 제목은 "길도 나이를 먹는다" 랍니다.

처음 해보는 거라며 쑥스러운듯 사인을 하는 모습이 마냥 소녀같죠?




송년회, 음악회처럼
….

 

끝났나 싶어지면 이어지는 송년회 이벤트~ ㅎㅎ 이벤트 맞는거 같아요.
잠시후 기타를 가지고 온 작곡가(?)와 회원들의 하모니가 울렸어요.

여기서도 빠질 수 없는 노래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을 모두 함께 불러봅니다.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생략.........




 

자작시를 노래로 부른 회원이에요. '풀이 일어선다'라는 애잔한 희망같은 가사가 아직도 아련하게 맴도네요.

입춘 - 김세경

풀이 일어선다
겨우내 젖 물고 있더니
아장 아장 걸어보겠다고 첫 발을 뗀다
섰다 섰다 섰다
........생략.......





송년회, 빛 바랜 추억처럼….

 

선물이 또 있었네요. 예쁜 도자기 화병에 담긴 계은죽~

기형도 시인 기념사업회 사람들의 따뜻한 정을 끊임없이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이 송년회라기보다 생일파티를 하고 있는것 같았어요. 지루할 틈 없이 오고가는 시인을 기억하는 이야기들과 얼굴 가득한 미소들.

또한 그들의 송년회는 곧미녀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요. 누구나 알고 있던 뻔한 송년회가 아닌 빛 바랜 사진처럼 기분 좋은 만남의 시간이었답니다.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죠.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조용히 빠져 나오려다 딱 걸려서 요란스럽게 작별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어요.

기형도 시인 기념사업회 송년회를 마친 후...
詩길 밟기 행사에 함께 했던 시인의 큰 누이와 오늘 송년회에 참석하신 작은 누이. 그리고 시인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따뜻함으로 시인의 엄마 걱정이 조금은 가벼워지길 바래봅니다.

12월 어느날... 바람이 유난히 따뜻한 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