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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소통/소소한 일상

가을, 색(色)을 입다 - 가을을 맞은 설월리를 찾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추남이라는 말을 쓰죠.

 

'고은' 시인(詩人)은 가을을 '비추(悲秋)'라 했습니다.

'비추(悲秋)'란 슬픔의 계절이라는 뜻이죠.

고은 시인은 존재론적인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한국전쟁을 겪은 후 죽은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을이란 계절은 감성에 젖기 쉬워 '비추(悲秋)'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비추의 계절인 '가을'에 자연은 아름답게 꽃을 피웠던 모습에서 결실을 맺고

서서히 다음 해를 준비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어쩌면 하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글을 쓸 때 사람인(人)에 사이 간(間)자를 씁니다.

어떤 이는 사람에 사이간(間)'자를 쓰는 이유를

'모든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지만, 각자 기억하는 시간과 공간은 다르며

내가 본 시간과 공간은 달리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가을을 맞은 광명시 설월리.

그곳의 시간과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진 속의 대문과 기와처럼 만들어질 때부터 자신의 색이 정해져 있기도 하지요.

그런데 인간은 성장하면서 점점 자신의 색을 갖게 됩니다.

 

원래 색을 갖고 있던 대문과 기와, 그리고 자연이 만든 파란 하늘을 보면서

존재론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감이 익는 계절, 가을입니다.

 

 

 

 

 

감은 푸른 색이었다가 점점 주홍 색으로 바뀌어갑니다.

 

 

 

 

 

한 여름 푸르고 무성하게 자라 있던 담쟁이도 이제는 갈색으로 변해있습니다.

담장을 아우르던 생기 있는 기운은 이제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변하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생이 다한 것을 알기에 스스로 변화했습니다.


 

 

 

 

텅 빈 공간에 주변의 색은 의식하지 않는 듯,

빨간색으로 익은 고추 역시 가을이 왔다고 알려주고 있네요.

 

이렇게 자연은 스스로 색을 변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봄에 피는 노란 개나리는 봄을 알려주는 신호인데요,

 

 

 

 

 

가을에 핀 노란 꽃들을 보니 마치 계절을 착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지나던 길에 별이 보였습니다.

그 별은 어둠 속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아니라

길가에 피어 있는 붉은 별이었습니다.

"이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이 아니더라도, 굳이 어린 왕자의 별이 아니더라도,

길가의 붉은 별은 낮에도 자신의 존재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높이 솟은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세히 보니 나무는 빼곡하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바람도 통하고 잎이 숨을 쉴 수 있도록 가지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주었네요.

 나무는 인간처럼 더 잘하려 하고 더 얻으려 하면서 스스로를 숨 막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알고 있나 봅니다.

 

 

 

 

 

생이 다한 나무도 보입니다.

나무의 무덤은 없습니다. 자연의 일부였으니 자연의 일부로 돌아갑니다.

 

 

 

 

 


이 가을이 가고 나면 황량한 겨울이 오겠죠.

그리고 자연은 또 다가올 봄의 색을 준비할 것입니다.

 

매번 반복되는 가을이지만,

고은 시인의 비추(悲秋)를 듣고 나서 본 가을은

예년의 가을과는 다른 계절로 다가옵니다.

 

 

 

글·사진 |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슈퍼맨(김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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