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랑 소통

안개 너머 피안길에서 시인을 만나다 - 신화가 되어버린 시인 기형도, 詩길 밟기

안개 너머 피안길에서 시인을 만나다
신화가 되어버린 시인 기형도, 詩길 밟기

제1기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곧미녀(김경애)
Blog. http://blog.naver.com/hvhklove
미녀의 정원



시민필진 카페에서 긴급하게 전해진 행사 안내 게시물이 나를 설레게 한다.

사실 나는 기형도 시인을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시를 접해 본 적도 별로 없고, 그의 일생을 들어 본 적도 없으니... 하지만, 알고 싶다. 그의 시와 그가 남긴 추억과 슬픔들을...

그를 추억하는 이들과 그의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참가 신청을 했다.
곧미녀가 시인을 만나러 가겠노라고...



10월 20일 목요일.

기형도 시인을 만나기 전, 나에게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의 길에서 그와 마주했을 때, 당황하지 않을 그런 준비.
조금이라도 그를 알아야 했다. 그것이 시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을 했다.
기형도 전집과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에 가까운 서점으로 향했지만, 판매원은 예약을 해야만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기형도 시인학교에 회원인 지인에게 전화를 해 보고, 그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는 광명중앙도서관으로 향한다.




무심코 잡아 탄 화영운수 12번 버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시인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반겼다.
버스 창가에 있던 시인의 얼굴.

순간 나는 행복했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꺼내고, 그의 얼굴을 담아본다. 그의 시를 담아본다.
내 입속에선 어느새 버스창에 있던, 그의 시가 노랫말처럼 흐르고 있었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중략......................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이 나부꼈다  .............중략..........................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시인과 첫 만남의 설렘을 버스에 실어 보내고, 나는 광명 중앙도서관 3층에 있다는 기형도 시인 전시실로 향했다.

그러나, 도서관 특성상 사진 촬영이 안된다는 말.
시민필진(명함을 내밀고)이라는 둥, 포스팅 준비라는 둥, 내일 있을 詩길 밟기 행사 이야기 까지 늘어 놓아야 했다.



다행이 몇 컷 정도만 촬영 허락을 받고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들고 시인의 공간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기형도 시인이 머물고 있는 3층 인문·자연과학실 안은 간간히 도서관 이용객들의 책 넘기는 소리와 발소리만이 들릴 뿐 적막 그 자체였다. 사진을 찍는 나에게 시선을 주는 이도 별로 없어서 나는 온전히 시인의 공간안에서 혼자 일 수 있었다.

벽에 걸린 그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빈집> 그가 마주했던 빈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책 읽는 이들이 내뱉는 낙엽같이 가벼운 소음 속에 그를 남겨두고 나서는 길.

버스에서 우연히 만났던 시인과, 도서관 한 부분을 차지한 채 나를 반기던 시인의 모습이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오는 내 손에는 기형도 시인 전집이 들려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를 만나지 못한 걸까?

도서관 앞 벤치에서 그의 삶을 펼쳐본다.

기형도 연보

 



드디어 10월 21일(금) 오전 10시가 되었다.
기형도 시인에 대한 내 얕은 지식을 숨긴 채 그를 추억하는 이들과 마주했다.



양철원 학예사님의 주제 발표(기형도의 생각을 읽다)와 함께 기형도 시인 詩길 밟기 행사는 시작되었다.



밝은 표정, 상냥한 걸음걸이. 그리고 시인의 길로 가는 마을버스 정류소에 걸린 하늘의 넓이 만큼이나 그의 시와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느낀 기형도 시인 詩길 밟기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첫인상이다.


여기 모인 모두의 마음을 닮은 포근한 바람이 10월 하늘을 가로지르며 얼굴에 스치고...
순간, 햇살 부시다.

오늘 우리가 걸어갈 詩길은 "안개 너머 피안길"
388종점(기형도 전집에 수록)에서 성채산(메모리얼파크 옆) 까지이다.




시인이 남긴 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그를 추억하고, 시인이 함께하지 못한 가을을 닮은 노란 은행잎이 전하는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양철원 학예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접어든 시인의 길 위에서 우리는 우연히 시인의 옛 친구를 만났다.
시인의 길 위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는 신영수씨는 멀리서 한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시인을 만나러 온 사람들임을 알아봤다고 했다.




시인과 초등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그는 시인의 길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듯, 인심 좋은 우리네 이웃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점심 밥상엔 시인의 친구가 담아낸 넉넉한 인심이 한 상 차려질 모양이다.

시인의 친구와 마주하고, 시인의 추억과 만나고 있는 지금.
그 추억 속 시인은 어디에 있을까?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들이여




시인의 부친이 연평도 출신이었고, 부친의 사업 실패 후 지인의 도움으로 시흥군 소하리(소하동)으로 왔으며, 부친 사망후 토지 주인의 자손들이 땅을 매각했다는 설명들을 들으며 일행은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 길 위에는 지금 곡식이 영글어 가을 걷이가 한창이고, 그가 살았던 뚝방마을 옛 집터 자리에는 시인의 추억과 함께 누군가의 미래가 숨쉬고 있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이곳에서, 시인은 기쁨과 함께 그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했을 아픔과도 마주했을 것이다. 또, 그 아픔을 시로 토해내는 법을 배웠으리라.



*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중략.............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시인의 길 위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詩길 밟기에 함께한 사람들은 시인과의 첫 만남과 그의 시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이야기 했고, 그의 집터가 보이는 성채산(메모리얼파크 입구)에서 한참동안 그의 시를 노래했다.

기형도 詩길 만들기에도 힘쓰고 있다는 기형도 기념사업회에서는 더 많은 이들이 시인의 시를 사랑하고 기억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나 또한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려 본다.

기형도 기념사업회는 광명 출신 시인 기형도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모임.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 하나로 1990년대 한국문단에 돌풍을 일으킨 기형도가 광명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5살때부터 광명 소하동에 살기 시작해 서른이라는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생의 대부분을 보낸 광명시. 그의 시 대부분이 그가 살았던 소하동과 주변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1989년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의 옛 집터가 광명시 소하동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이 자연스럽게 시인 기형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기형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 졌다.

언젠가 기형도 시인의 詩길이 만들어 진다면 그 길은 "안개 너머 피안길"이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중략.............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시인이 거닐었을 뚝방길 위에서 우리는 시인이 없는 10월과 마주한다.



*10월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중략.....................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억세가 바람에 흔들리고, 코스모스는 엷은 향기를 붙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며,,,,어쩌면,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추억과 만날지도 모른다.





시인의 추억 속 뚝방길을 따라 도착한 곳,

그의 시(위험한 가계.1969)속의 상장 종이배가 떠내려 갔을지도 모를 안양천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하기로 한다.



*위험한 家系.1969  1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쌓아둔 이불에 둥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중략..................  5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 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중략...........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 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생략................





우연히 마주쳤던 기형도 시인의 친구가 시인의 노모와 함께 나타났다. 아들 친구의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오신 시인의 노모와 큰 누이.
시인의 길 위에서 우리는 시인이 남기고 간 세월과 마주하게 되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반가움에  모두들 고향 어머니를 만난 듯한 기쁨을 느꼈다.



기형도 시인의 노모와 함께 그가 남긴 시를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시들은 시인을 사랑하는 이들의 떨리는 음성으로도, 처음 참가하는 이들의 어색한 음성으로도 울려퍼졌다. 많은 사람들과 그의 누이(쥐불놀이 낭송)의 음성으로 되살아난 기형도 시인의 詩를 시인의 노모는 두 눈 꼭 감고 가슴으로 듣고 있었다.



*쥐불놀이        -겨울 版畵 5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돌리세요, 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기형도 시인의 시와 함께 누이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대보름날 온 동네를 환하게 밝히던 쥐불처럼....
시인의 길 위 시인을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커다란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 가슴속을 맴돌고 있는 시인의 詩 하나.

그의 노모를 위해 부르지 말자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로 가슴아픈 노래가 되어버린 詩.

처음 들었지만, 온종일 아니 포스팅을 하는 지금까지도 가슴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노래.
시인의 <엄마 걱정>이 울리는 동안 노모의 눈은 또다시 꼭 감기고, 누이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

시인의 노모의 얼굴이, 누이의 미소가 그리고 그의 시들이 가을 하늘 잠자리처럼 머릿속에서 맴을 돈다.

너무 어려운 포스팅이 될 거라는 예감이 적중했다.

처음 기형도 시인을 만나러 12번 버스에 올랐을 때부터, 그의 전집을 읽고, 시를 읽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오늘 포스팅을 마무리 하는 순간까지 나는 아직도 처음 느꼈던 설렘을 느끼고 있다.



기형도 시인 詩길 밟기에 함께 했던 양철원 학예사님과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시인의 어머니와 누님에게도 포스팅을 마무리 하며 한 번 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광명에서 기형도 시인을 만나고 싶다면

 1. 하안 도서관과 중앙 도서관 3층 기형도 시인 코너가 있다.(하안도서관: 02-2680-2871.중앙도서관:2680-6523)

 2. 기형도 기념사업회(회장,최평자 http://cafe.daum.net/khdgm). 하안 문화의 집(http://www.ha-an.com)에서도 기형도 시인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