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운산고등학교에서 기형도 추모행사가 있었어요. 이번 추모행사는 운산고 문학 동아리 '기형도 연구 프로젝트'에서 조촐하게 추모행사를 마련했답니다. 제리도 추모행사에 초대를 받아 참가했어요.
3월의 춘풍이 몸을 파고들던 봄날의 오후. 그림자가 아직은 쌀쌀해 보입니다.
그런데 작년에도 운산고에 왔건만 제리는 버스를 잘못 타고 하차하는 곳을 잘못 알아 엉뚱한 곳에 내렸어요. 가뜩이나 약속시간에 늦었는데, 목적지까지 잘 못 내리다니...ㅜ.ㅜ 이런 상황을 설상가상이라고 하던가요?
헉헉 핵핵 숨이 찼지만 필진 정신을 발휘했답니다. 여러분께 '기형도 오빠'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어요. 교문 기둥에 익숙하고 정겨운 이름 '우리가 기억하는 기형도'가 쓰인 행사 안내문이 저를 반겨줍니다.
행사가 진행될 강당으로 들어가니 아직 학생들은 오지 않고 관계자들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이날의 행사 내용은 이렇게 시간별로 안내되어 있었답니다.
저보다 먼저 '시락'회원들이 행사장에 도착했네요. 저를 비롯한 '시락' 회원들이 기형도의 시를 카메라에 담아 봅니다. 이 순간 기형도는 우리 곁에 한발 더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행사장에서는 운산고 학생들과 국어 선생님들의 기형도 사랑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들이 꾸민 행사장에서 그들의 기형도 사랑이 진하게 풍겨 나왔답니다.
오늘 무대에 설 문학청년들을 기다리는 것이 여기 있네요. 바로 시를 낭송하고 영상발표 시간을 더욱 빛내줄 조명입니다. 조명의 화려한 색깔이 무대를 어떻게 변신시켜줄지 기대가 됩니다.
벽면에 걸려 있는 기형도의 시.
기형도의 시가 강당에 서정을 짙게 드리웁니다. 기형도의 시는 읽으면 왠지 쓸쓸해집니다. 그 쓸쓸함은 사색으로 이끌어 주기도 하고, 그의 시를 자꾸만 읽어보게 합니다.
이건 기형도 생가터에 만들 안내현판의 내용이라고 해요. 그동안 광명사람 그리고 기형도의 시를 사랑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이 그의 생가터나 그의 시에 등장하는 장소를 찾았을 때 안내문이 없어 늘 아쉬워했었죠. 운산고에서 안내현판을 달 계획이라고 하니 참 기쁜 소식입니다.
창작곡 '빈집'을 시작으로 이날의 추모행사가 문을 열었습니다. 작년 '기형도 연구 프로젝트'수업발표회 때 소개된 적이 있는 운산고 교사중창단이 열창했어요.
기형도 시에 곡을 붙여(홍진호 선생님) 노래(홍진호, 김영남 선생님)를 부르는 열정적인 선생님들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짝짝짝~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유족이신 큰 누이분도 참석하여 학생들의 관심에 격려와 사랑을 전했습니다.
"동생을 잊으려 한 적도 있지요. 운산고학생과 선생님들을 만난 것이 동생과 다시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다시 '빈집'에서 나오게 되어 이제 동생은 아픔이 아닌 시를 통해 기억하는 존재입니다. 누이로서 24년 전에 곁을 떠나간 기형도를 기억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작년 기형도 시 영상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은 한지원 학생(부회장, 3학년)의 제작영상 상영과 함께 시 낭송이 있었어요. 한지원 학생은 이상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신의 영상을 이해하며 감상해 달라고 당부하여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답니다.
부회장답게 씩씩한 목소리와 자신감 넘치는 자세가 보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었어요. 가끔 눈을 지그시 감고 낭송하는 모습에서는 진지함이 묻어나 먼 훗날의 시인을 그려보게 하더군요.
3학년 6반 최예은 학생이 잔잔한 목소리로 낭송한 '대학 시절'을 통해 기형도 시인이 대학을 다닐 때의 시대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답니다.
기형도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또한, 젊은이들의 고뇌와 한 청년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시를 들으니 '시는 영혼을 어루만지는 행위'라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이어서 조동범 시인의 강의가 이어졌어요. 그는 기형도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기형도의 독자였다고 해요. 신춘문예등단 이후 어느 동인의 시화전에서 기형도를 처음 만났는데, 동경하던 기형도를 직접 만났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강렬하게 남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가 시를 쓰게 된 시작점은 기형도였으며 문학잡지에 발표되었던 기형도의 시를 열심히 읽었던 시절을 회고했어요.
한 사람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그의 생전 이야기를 누군가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 들을 때 우리는 그가 옆에 있는 것이라 착각을 하게 됩니다. 제리는 기형도가 노래를 참 잘 잘했었다는 대목에서 그의 노래를 육성으로 듣고 싶다는 충동에 눈물이 날 뻔 했답니다.
기형도 기념사업회원이신 최평자님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를 낭독해주셨어요. 이 분의 시낭독을 듣고 나면 온 마음이 녹아내린답니다. 듣고 싶은 분은 연락 주세요.
이어서 이선일 학생의 '체육대회'시 낭송을 들었습니다. 기형도의 시 '엄마걱정'을 패러디 한 시라고 해요. 모방, 패러디는 시를 쓰는 과정 중 거쳐 가는 과정으로 꼭 필요한 과정이지요. 시에 대한 재미를 선사해 주기도 하구요.
이번 행사는 한 반에 네 명씩 신청을 받아서 참석자를 정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의 관심도를 짐작해 볼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시락의 시 노래가 있었습니다. 물론 '시락' 회원인 저도 무대에 올라갔어요. MR이 약간의 문제를 일으켜 연습을 못하고 목도 풀지 못한 상태에서 무대에 섰어요. 그래서 무대에서 마음껏 노래하지 못하고 실수도 했었답니다. ㅠㅠ
우리의 노래가 끝나자 사회자께서 천상의 목소리라고 소개해줬던 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학생들에게 정말 멋진 목소리로 불러 줄 거랍니다.
이날 무대에서 기형도의 '엄마걱정'을 불렀는데, 기형도의 엄마걱정을 부르고 나면 엄마 생각이 나서 효녀가 되는 것 같아요.ㅎㅎ
엄마 생각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영원히 기억될 이 순간을 사진에 담으며 이날 행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행사 후 저녁을 먹으며 광명의 시인 기형도를 기억하고 문화콘텐츠차원에서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답니다.
시나 문학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예술에 대한 가치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극적인 영상매체가 흔한 이 시대에 시를 자주 접하다 보면 정서순화는 물론이고 따뜻한 감성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광명표 따뜻한 감성을 지니기 위해 기형도와 그의 시를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사진 | 제리(이현희)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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