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오 가까이, 정남향 하늘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즈음, 화영운수 총무부에 전화벨이 울린다.
"네. 총무부 양철운입니다."
"예, 수고하십니다. 전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이세희라고 합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네? 온라인 뭐요?"
세희는 철운에게 온라인 시민필진에 대해 설명하느라 꽤 오랜 시간을 써야 했다. 그러나 세희가 원하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철운은 광고 게시 담당자가 아니었다. 담당자 김 계장이 자리에 없으니 나중에 전화해보라고 했다.
세희는 급한 마음에 다음날 바로 시민필진 카페지기 유니 언니와 화영운수를 찾았으나 입구에서부터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한다는 말에 담당자를 만날 수 없었다. 세희와 유니는 답답했다. 성질 급한 유니는 입구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 총무부에 전화했다.
"여보세요? 저 온라인 시민필진 허유니라고 하는데요. 저기 너무 궁금한것이 있어서요."
"네? 뭐가 궁금하신지요?"
"왜 버스에 기형도의 시가 걸려 있는지요?"
"아, 예! 잠시만요."
철운은 수화길 손으로 막고 조용히 광고 담당 김 계장에게 물어본다.
"계장님, 또 그 온라인 필진인가 뭔가 하는 여잔데, 또 기형도 얘기를 하네요. 어떻게 할까요?"
"그걸 꼭 나한테 물어봐야 돼? 멍충아! 없다고 하고 적당히 끊어!"
김 계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주눅이 든 철운은 담당자가 자리에 없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유니는 수화기를 통해 들은 김 계장의 기척을 모른 체하고 일단 알았다며 전화를 끊고 세희에게 물었다.
"세희씨, 분명 담당자가 안에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뭐 때문에 숨기려고 할까?"
"글쎄요. 왜들 저리 호들갑일까요? 그냥 갑자기 바뀐 이유가 살짝 궁금할 뿐인데 뭘 저리 감추려고 하죠? 더 궁금해지게…."
세희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원익이든, 기형도든 광명시를 누가 대표하던 지에 대해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누가 결정되더라도 대표의 적합성을 논할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바뀌어 누군가에게 큰 이득이 있었다면 쉽게 풀리겠지만 세희와 유니 둘만의 추측으로는 그 이유를 알 방법이 없었다.
“계장님, 이제 포기한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 같던데….”
“온라인 필진인지 뭔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야? 그 여자들한테 또 전화 오면 무조건 없다고 해. 절대 출입금지 시키고!”
“뭐. 계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야 따르겠지만 사실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 저도 내부 회의 때 이원익 선생 사진이 걸린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막상 보니 기형도 시인이더군요. 사실 저도 좀 의아하긴 했습니다.”
“거 참, 알 필요 없다니까. 하던 일이나 계속하라고.”
화영운수는 내부회의를 통해 경기도 테마버스 운영과 관련, 오리 이원익을 광명의 대표 인물로 정했다. 광명시와도 그렇게 협의했다. 그리고 분명히 마지막 광고인쇄를 발주하며 업체에 오리 이원익으로 결정됐다고 통지한 사실이 있다. 이메일을 통해 후보인 기형도와 이원익 두 가지 파일을 보내긴 했지만 전화로 분명히 이원익이라고 알렸음에도 인쇄업체는 아니라고 발뺌이다. 김 계장은 인쇄업체가 정말 괘씸하고, 미울 뿐이었다. 오랫동안 일해온 업체라 믿었건만 그 건으로 광명시청 노상술 주무관과 사장에게 불려다닌 걸 생각하면 김 계장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다행히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이해관계도 없던터라 쉬쉬하며 넘어 갔지만 이 문제를 계속 들춰내려는 시민필진들 때문에 김 계장은 죽을 맛이었다.
5.
세희는 곰곰히 생각하다 화영운수를 포기하고, 광명시를 뒤적였으나 별소득이 없었다. 담당자인 노상술 주무관은 시와 운수업체가 협의하여 결정한 사항이라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광명시중앙도서관 자료실까지 여러차례 살펴봤지만 결국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세희는 혹시 시민필진이라는 직함이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으로 홍보실 광명시 블로그 운영자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영자님. 혹시 노상술 주무관 아세요?’
'알고 있다능. 조금 유명한 분이라능. 왜 그러심?'
'그분 좀 만나고 싶어서요.'
'그 양반한테 관심이라도 있으신 거임?'
'소개팅 시켜주면 밥 한 번 사달라능. ㅋㅋ'
'심각한 내용이라능. -_-'
'넵. 무슨 일이죠?'
'있잖아요. 그 노상술 주무관…….'
세희는 평소 운영자를 신뢰했다. 장난기 많은 운영자는 필진과 대화의 장벽을 낮추려 부던히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대화의 9할이 실없는 농담이었지만, 필진들이 부탁한 일만큼은 완벽하게 챙겨주는 편이었다.
운영자 말에 의하면 노상술 주무관은 시장이 뭐라해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고집만 부리는 사람이란다. 게다가 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었음에도 주변과 소통하지 않는단다. 선배는 물론이고, 후배나 동기에게 술 한 번 사는 법이 없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보지도 못했단다. 다시 말해 앞뒤가 꽉 막혀 업무협조가 안 된다는 것이다. 세희는 운영자를 통해 당장 노상술 주무관을 찾아가 끈질기게 매달려서라도 말하게 하고 싶다고 했지만, 운영자 역시 세희를 단념시키려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신뢰하던 운영자까지도 말리는 통에 세희는 한계를 느끼며 그만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운영자에게 인쇄 업체가 어딘지만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세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이세희입니다.”
“예, 접니다. 인쇄 업체 어딘지 알아냈어요.”
“어딘데요?”
“뭐, 별로 특이한 업체는 아니네요. 이름은 한결 인쇄. 전화번호랑 주소는 카톡으로 보낼게요.”
“네. 감사해요. 영자님.”
세희는 운영자에게 받은 주소를 확인하고, 스마트폰으로 위치와 교통편을 뒤져 한결 인쇄소를 찾아나섰다. 하필 그때 세희의 스마트폰 위치 정보 서비스까지도 말썽이었다. 세희는 12번 버스를 타고 소하사거리 정류장에서 내려 한참 주택가를 헤매다가 겨우 근처 복덕방에 들어가 한결 인쇄소 위치를 알아냈다.
'무슨 인쇄업체가 이런 후미진 주택가 골목에 있담. 휴….'
“저…. 여기요!”
“...”
“누구 안 계세요?”
소음 심한 인쇄소 안에서는 세희의 인기척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세희는 그 중 가장 가까이 있는 사내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건냈다.
“여기 화영운수 기형도 건 인쇄한 곳 맞죠?”
사내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껌벅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세희는 갑갑함을 느끼며 멍하니 서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오른쪽 공간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인쇄소 한쪽 문이 열리고 장대한 사내가 세희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세희는 어두운 인쇄소 조명을 등지고도 꽤나 이목구비가 뚜렷해 보이는 그 사내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사내는 맑고 청량한 목소리로 세희에게 싱긋 웃으며 말을 건냈다.
“이렇게 미인이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저쪽에서 말씀 나누시죠.”
“아, 네….”
세희는 조각처럼 잘생긴 이 사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상기된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얼굴을 돌렸다. 평소 잘생겼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내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개의치 않고 세희를 작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세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조심스레 시민필진 명함을 내밀며, 자신은 시민필진이고, 광명시 테마버스에 실릴 이원익이 갑자기 기형도로 바뀐 사연을 조사 중이라는 말과 함께 아무런 단서가 없어 절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쇄소 말고는 더 이상 갈 곳도 없어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찾았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잠시 뒤 자신이 단순 호기심으로 시작된 일임과 이제는 많이 지쳐있다는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 사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사실 세희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세희는 가녀린 어깨를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왜 이러고 있나 모르겠네요. 수고하세요.”
세희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별 의미 없는 일에 이토록 집착하는 자신의 호기심을 책망했다. 나지막히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세희에게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핫. 그런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축하드립니다. 범인 잡으셨습니다.”
“아. 네. 그렇군요…. 네? 범인이요?”
2부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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