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을 흐르는 소나무 향기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선생을 뵙다
제1기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참새(박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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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과 참새
얼마 전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선생의 묘역에 다녀왔습니다.
묘는 뜻밖에도 대로변에 있었습니다. 대로변의 이 표지판이 지시하는대로 바로 10미터 앞에 묘가 있습니다. 향토문화유산 2호입니다.
※ 참고로 향토문화유산 1호는 광명시민회관 앞에 위치하고 있는 철산동 지석묘라고 합니다.
정원용 선생 묘역 근처엔 버스 정거장까지 있습니다. 학온동 온신초등학교 사거리에서 한 정거장 거리에 위치한 이 곳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묘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 기사님(?)을 대동하고 갔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번쩍 눈에 띄는 이 입간판(?)이 병풍처럼 멋지게 묘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의 수령을 알려줍니다.
잠시 소나무가 그려낸 풍경에 눈길을 빼앗겼지요. 여기서 보이는 묘역은 정원용 선생의 부친인 정동만 선생의 묘입니다. 정원용 선생(1783~1873)은 1824년(순조 24년) 아버지 정동만의 묘소를 현재의 광명시 학온동으로 이장하면서 이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부친묘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바로 정원용 선생의 묘인데 부인 강릉 김씨와 합장묘입니다.
지난 번 이순신 장군의 묘와는 달리 넓고 아늑한 공간에 이르자 마음도 저절로 따뜻해지는 듯 했습니다.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전혀 모르지만, 일단 사람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는 그런 공간이 명당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원용 선생이 계신 곳은 명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묘비, 상석, 향로석, 그리고 망주석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좌우에 작은 기둥처럼 서 있는 것이 망주석입니다.
조선국의 의정부 영의정이었던 시호가 문충인 동래 정씨 정원용 묘이고 정경부인인 강릉김씨와 합장한다. 뭐 이런 뜻이겠지요...?
디지털 광명문화대전 검색창에서 "향토문화유산"을 검색하고 "정원용 묘갈(鄭元容 墓碣)"을 클릭하면 비문의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은 맏아들이 짓고, 글씨는 손자가 썼으며 고종 13년에 세워졌습니다.
상석과 향로석인데, 상석 밑에 축구공보다 조금 큰 듯한 돌이 있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상석과 향로석은 제가 보기엔 근래에 만들어진 거 같더군요... -_-?
여기서 간략히 정원용 선생의 일생을 요약해보겠습니다.
정원용 선생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본관은 동래(東萊)입니다.
순조 2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헌종 3년에 예조판서로 승진되고, 이후 이조, 공조, 병조, 형조 판서를 역임한 뒤 헌종 7년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헌종 14년 영의정이 된 후, 헌종이 승하하자 강화에 있던 덕원군을 철종으로 옹립하였습니다.
철종 대에 관기가 문란하고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암행어사 제도의 부활을 건의하였습니다.
철종이 승하하자 고조이 즉위할 때까지 정사를 총괄했고,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을 주관하였습니다.
고종 10년에 91세로 별세하였고 시호는 문충입니다. 글씨와 경술과 문장에 능했으며 『경산집』,『북정록』,『황각장주』,『문헌촬요』 등의 저술이 있습니다.
순조 2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헌종 3년에 예조판서로 승진되고, 이후 이조, 공조, 병조, 형조 판서를 역임한 뒤 헌종 7년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헌종 14년 영의정이 된 후, 헌종이 승하하자 강화에 있던 덕원군을 철종으로 옹립하였습니다.
철종 대에 관기가 문란하고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암행어사 제도의 부활을 건의하였습니다.
철종이 승하하자 고조이 즉위할 때까지 정사를 총괄했고,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을 주관하였습니다.
고종 10년에 91세로 별세하였고 시호는 문충입니다. 글씨와 경술과 문장에 능했으며 『경산집』,『북정록』,『황각장주』,『문헌촬요』 등의 저술이 있습니다.
뒤에서 바라본 묘역의 모습입니다. 이번엔 완전히 개방된 길가에 있어서 백년을 두고 전해지는 소나무 향기를 깊이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예전에는 깊은 산중이었는데 점차 개발되어 이렇게 되었겠지요.
아름다운 소나무 병풍을 바라보며 정원용 선생과 얽힌 설화를 떠올려봅니다.
정원용이 관직에 나가기 전에 전라감사로 있는 외삼촌을 만나러 갔다.
외삼촌은 귀가하는 정원용에게 학비에 쓰라고 많은 돈을 주었다. 돌아오는 도중 어떤 마을에서 여인이 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진사라는 사람의 일곱 식구가 모두 괴질에 걸려 부인만 남고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들은 정원용이 부인에게 "죽은 시체는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괴질로 죽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돈도 없어서 망막하다"는 하소연을 들은 정원용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귀가한 정원용이 어머니께 모든 일을 고백하고 사죄를 하자 어머니는 뜻밖에도 "너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해주었다.
외삼촌은 귀가하는 정원용에게 학비에 쓰라고 많은 돈을 주었다. 돌아오는 도중 어떤 마을에서 여인이 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진사라는 사람의 일곱 식구가 모두 괴질에 걸려 부인만 남고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들은 정원용이 부인에게 "죽은 시체는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괴질로 죽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돈도 없어서 망막하다"는 하소연을 들은 정원용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귀가한 정원용이 어머니께 모든 일을 고백하고 사죄를 하자 어머니는 뜻밖에도 "너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해주었다.
이 설화는 198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4-4의 522~535쪽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1년 2월 21일 박계홍, 황인덕 등이 양해준[남, 64]에게서 채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검소하고 청렴한 관리였던 그는 지금 저 소나무들의 일부가 되었겠지요.
한 번 쯤 저 소나무들에게 눈길을 준 사람을 검소하고 청렴하게 만드는, 신비한 마력이 저 소나무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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