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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소통/광명여행

큰 역사 속에 묻힌 작은 영웅 - 무의공 이순신 선생을 아시나요?

 

큰 역사 속에 묻힌 작은 영웅
무의공 이순신 선생을 아시나요?

제1기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참새(박문형)
Blog. http://fbpark.tistory.com
도마뱀과 참새


소설을 원작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극 중에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 참모들 중에 또 다른 이순신(李純信) 장군이 방답(전남 여천군 돌산면)에 첨사(종3품의 무관)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광명시에서 꼽는 역사적 위인으로는 오리 이원익 선생과 민회빈 강씨, 정원용 선생 등을 꼽고 있는데, 정작 TV 드라마에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낸 무의공 이순신 장군은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 역시 이순신 장군은 고향인 서울 광화문에 동상이 세워져 있어서 잘 알고 있지만, 이순신 "선생"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도에서 KTX 광명역을 찾으면 "이순신 선생 묘"가 보입니다.
우리집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언젠가 한번은 가보기로 마음 먹었지요.

얼마 전, 집안에 일이 있어서 조금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 날, 이순신 선생묘에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이순신 선생묘는 집에서 가깝기는 했지만 근방이 모두 임야이고, 도로에서 산 중턱에 있는 묘역까지 길 다운 길이 없는 그런 상황이기에 땀 뻘뻘 흘리며 고생 좀 했어요.-_-;;;;;;;

빨간 점을 찍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한쪽에는 밭이 있는 좁은 산길로 올라가야 합니다.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룰루랄라~ 출발했지만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아서 멀찌감치 차를 세워두고 길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답니다.

멀리 KTX 광명역이 보입니다. 여기서 400미터 더 직진해야 합니다. 가로수에 가려진 이정표가 있습니다.



 

겨우 찾아내었습니다. 오른쪽 비닐 하우스 안에서는 파가 재배되고 있었습니다.
지도에 찍어놓은 빨간점의 위치입니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묘는 향토문화유산 4호입니다.

표지판에는 선생묘가 아니고 장군 묘라 써있군요. 그렇다면 선생이란 호칭은 어떻게 된 건지... o_o?
광화문에 계신 분을 선생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데 말예요.

앞장 서서 올라가는 분이 동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나서지도 못할 길이었어요.
인적이 없는 산길입니다. 주변에 경작물이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묘가 2기입니다. 망주석과 상석이 없는 묘는 장군 부인의 묘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햇볕이 쨍쨍한 한낮입니다. 묘비는 원래 있었는데 망실되었다고 합니다.



 

이 표지판이 없다면 이순신 장군의 묘임을 알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표지판에는
이순신 장군(1554~1611)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자는 입부(立夫), 본관은 전주이다.
선 조 11년 무관에 급제, 은성, 의주 판관을 거쳐 혜산진첨절제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방답진첨절제사로서 충무공 이순신 막하에서 중위장으로 옥토해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뒤로는 전위장으로서 선봉이 되어 당항포, 한산, 부산포 해전 등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8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개선하였다.
1604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임진왜란의 공으로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완천국으로 봉해졌다.
1611년 호남절도사로 재임중 58세로 별세하니 시호는 무의이다.
무덤의 봉분은 호석을 두른 사각 형분으로, 호석 앞명은 1.6m와 2m의 장대석 2개를 둘렀고 측면은 2m가량의 장대석으로 2개를 놓았다.
봉분앞에는 문인석, 망주석, 상석, 향로석, 문방석 등의 옛 석물이 놓여 있다. 문인석은 금관조복형으로 몸통이 두터운 점이 특징이다.
라고 쓰여있습니다.



 

정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더이상은 뒤로 물러서서 찍을 수 없었어요.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서면 굴러떨어지니까요. ^^



 

문인석입니다. 금관조복형으로 몸통이 두터운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금관조복형이란 신하들이 조회를 설 때 의관을 갖춰 입은 모습을 말합니다.
두 손 모아 들고 있는 것이 "홀(笏)"입니다.



 

문방석은 안상문이 새겨져 있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 고 있습니다.
봉분 하단은 사각형입니다. 



 

이순신 장군 묘 앞은 낭떠러지 입니다. 아니 직각에 가까운 경사면이라고 해야 하나요.
이번 장마로 흙이 유실되어 임시 조치를 취한 듯 싶습니다. 조금만 더 유실되면 문인석이 사진에서 보이는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질 상황입니다.

문인석 바로 옆에 있는 망주석은 부러져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훼손된 것 같습니다.
망주석은 바라보는 기둥돌이라는 한자어입니다. 혼령이 밖에 나가 놀다가 돌아올 때 표식으로 삼는 돌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경기문화재단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면, 무의공 이순신 장군은 광명시 일직동에서 출생 성장하셨으며, 청렴하고 강직하셨기에 일생 동안 많은 고초를 겪으신 분입니다.

해군 함정 중에는 이순신함이 2척 있습니다. 하나는 4,000톤급 한국형 구축함이고, 다른 하나는 국산 7호 잠수함입니다. 구축함에 붙은 이순신은 우리가 잘 아는 충무공 이순신이고, 바로 국산 7호 잠수함의 이름을 이순신호(李純信號)로 명명하여 이순신 장군을 기리고 있습니다. 충무공이 1등 공신이었다는 것과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웅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또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기준으로 굳이 나눈다면 충무공은 큰 이순신이고, 무의공은 작은 이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에 사는 악독한(?) 모기떼가 덤벼든다며 빨리 가자고 독촉하는 남편 때문에 자리를 떠야했습니다.
1등이 아닌 2등의 뒷모습을 본 것 같은 씁쓸함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각일뿐,

장군은 1등도 2등도 없는 영원한 고요 속에서 여전히 저마다의 탐욕으로 시끌벅적한 산 자들의 세상을 씁쓸해하고 계시지나 않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