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그렇다.
날이 더워서 숨 쉬는 것조차 짜증이 날 때가 많지만,
단비 한 번에 감성이 충만해지고,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문득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 놀다가도 노을이 지는 광경에 하나, 둘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는데....
이런 날씨가 한창일 땐 방학기간이었나?
그러고 보면 그 때 난 뭐하고 있었더라...
태어난 곳은 광명인데, 유년 시절은 대부분 인천에서 보냈다.
그러기에 어린 시절의 애틋함과 데자뷰를 느끼는 것이나
날씨를 느끼면서 차오르는 벅참 등의 아련한 감정은
대부분 인천 살 때의 기억에서 느끼는 것 같다.
주위에서 예전 살던 동네의 느낌을 만나면 더욱 그렇다.
어릴 때, 저층 아파트에 살았지만, 아파트를 나가면 빌라들이 잔뜩 있었다.
그 사이에 내가 좋아하던 비디오 가게도 있었고...
어린아이가 없는 곳이어서 그랬는지 동네에서 이쁨을 독차지했었다.
어릴 때의 기억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터라,
요즘 빽빽하게 올라오는 고층 아파트와 주택들 그리고 번화가를 보노라면,
삭막하고 막막한 느낌이 든다.
마치 딱딱한 문구점 아저씨를 보는 듯하다.
당시 내가 싫으셨던 건지 장사가 안 되어 그러셨던 건지.... 그래도 어릴 땐 문구점이 마냥 좋았다.
군것질거리도 장난감도 사무용품도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된 곳이 많아서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려면 멀리 나가야만 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추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철산4동, 달동네라 불리는 곳을 방문한 것은 지난달 23일,
'철산동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된 후의 일이다.
'철산동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2006년에 문화관광부 주최로 이루어진
공공미술 사업(아트 인 시티)의 일환이었다.
넓은 골목골목에서 목적지를 딱 정해놓지도 않고, 무작정 찾아 나섰더니
여간 막막한 게 아니었다.
제일 처음 향한 곳은 철산 4동의 끝자락이었다.
단순히 벽화를 찾아 나섰던 행로는 생각 이상으로 벅찬 감정을 주었다.
제일 처음으로 찾은 흔적.
벽화인지 낙서인지 모르겠지만, 무심코 지나가는 길에 빼꼼히 숨어있었다.
누군가의 집일 텐데...
철산4동을 방문하기에 앞서서 조금 걱정스럽고 고민스러운 것이 있었다.
나 자신이야 벽화를 찾아서 찍고,
그리고 어릴 적 기억을 되새기고자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는 폐가되진 않을까... 주민들 입장에서 조금 생각을 해보았다.
나야 정겨울지라도, 정작 거주하시는 주민들에겐 구경거리 취급받는 느낌을 주진 않을까, 하고
내심 하루 종일 고민을 했다.
출사지라고 하여 우루루 몰려들어와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다고 들어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게 괜히 죄송스러웠다.
사진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니, 우루루 몰려와 찍은 기억이 무슨 의미가 있으려나... 싶기도 했고....
이기적이라고 할 지 몰라도, 철산4동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내 만족을 위해서?
그것도 크게 작용했지만,
추억 덩어리들을 재개발로 잃는다는 것은 여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으로 찾은 벽화였다.
강아지가 쳐다보는 것이 여간 정겹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좀 더 봐주었으면 좋을 텐데... 카메라를 드니 저 멀리 도망갔다.
어딜 그리 도망가는 건지... '행운길'이라더니...
저 위에는 행운이 기다리는 걸까?
코너를 돌아서 보니, 지금은 많이 닳은 계단 벽화가 있었다.
희미하지만 종이컵에 실을 달은 전화기 그림이었다.
유치원 다닐 때 친구들이랑 실전화기로 첩보요원 놀이를 하던 게 생각이 난다.
그때도 이런 계단에 숨가쁘게 뛰어들었었다.
고추를 집에서 키우시는 모양이다.
어릴 때 강낭콩을 키웠었는데, 싹이 날 즈음해서 비둘기가 물어갔었다.
그 때문에 비둘기만 보면 적대감이 솟구치는 걸지도 모르겠다.
벽화와 어울리는 상점의 디자인...
작은 문으로 보이는 넓은 세상.
어쩌면 광명시에서 가장 여유로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눈을 돌리니 등대가 있었다.
밑은 바다요, 앞은 풀들이 즐비하니, 기분이 좋았다.
바다를 따라서 작은 물길로 괴(怪)한 물체가 지나간다.
그 작은 물길의 끝엔....
상어가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덕에 잠수부는 목숨을 부지한 것 같다.
역시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것일까?
헤매기 시작했다.
애초에 4동이라는 하나의 동(洞)에서 길도 모른 채 찾아 나섰다는 게 바보 같은 일이긴 했다.
그것도 이렇게 더운 날....
그래도 뭐 어떤가 싶었다. 마음에 들기만 하면 되지.
그랬다. 마음에 들면 되는 것이었다.
담벼락 위로 빼꼼히 얼굴을 내놓은 꽃이 참 정겨웠다.
문 위로 참외도 있었다.
할머니 댁에 가면 감이랑 참외랑 슥슥 따서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애호박이 마르고 있고... 나는 1시간째 헤매고 있다.
슬슬 벽화를 보고 싶었다. 날은 덥고...
더위에 찌들어서 터벅터벅 걷는데, 뒤에서 중년 여성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진 찍는 사람이에요?"
마음 한켠이 덜컹했다. 기분이 나쁘셨을까?
"그러면 이 꽃 좀 찍어줘. 밤에는 진짜 이쁘고 향기도 좋은데,
낮이라서 덜 이쁘긴하지만...."
다행이었다.
꽃들을 정말 정성스럽게 기르시는 것 같았다.
말씀하시는 내내 꽃들을 가꾸시는걸 보니 마음이 더 좋았다.
"음료수 하나 먹고 가요."
이거다.
아파트에서, 혹은 번화가에서 사진을 찍다보면
"뭐야, 왜 날 찍어?" 하는 말들과 좋지 않은 눈초리들을 많이 만난다.
사람을 찍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 곳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그런 정겨운 느낌... 이거였다.
아까 뵈었던 분의 말씀을 참고하여 길을 다시 떠났다.
드디어, 저 멀리 보이는 벽화...
얼음땡이라서 눈꽃송이를 그려놨을까?
계단에도 그림이 있지만, 많이 지워졌다.
길을 다시 헤맸다.
그리고... 철산4동의 경계점에 섰다.
글을 보는 당신에게 어느 곳이 더 좋은가 여쭈고 싶다.
조금 더 가파르게 길을 올랐다.
뭐가 이리 긴지. 뱀인가?
날이 덥다보니 내심 빼빼로이길 바랬다.
저 위에는 팥빙수가 있겠지....
또 종이컵 전화기였다.
계단을 다 올라서자 산책하기 무척 좋아 보이는 길이 보였다.
날이 덥지만 않다면 한번쯤 걸어볼 텐데...
훼손이 되었다.
그래, 그것마저 정서적(情緖的)이다.
슬슬 힘에 부친다................
가장 길고 마음에 드는 벽화를 만나니,
조금 기운이 생긴다.
새와 사과.
새가 놀 곳이 없을 정도로 훼손해서 사과를 받아달라는 건지
순수하게 새가 좋아서 사과를 건네는 것인지...
어린 시절의 나였다면,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동심이 묻어있는 그림이 좋다.
어렸을 때 동네에 이런 것이 있었다면 벽에 낙서해도 혼나지 않았을 텐데....
나도 사과나무를 이렇게 그렸던 적이 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마인드맵의 느낌이 강하다.
옆집엔 큰 이모, 윗집엔 막내이모, 아랫집엔 할머니...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렸던 것이 생각이 난다.
조금 쉬어가자. 허리를 폈다.
저기 우리집도 보인다.
이번엔 그림보다는 표면이 타일조각 느낌이 나는 작품이었다.
미술시간에 모자이크라고 부르면서 색종이를 좍 찢었던 거 같다.
어릴 땐, 잠자리건, 너구리건, 사람이건, 얼굴은 항상 저랬다.
그때는 정복욕(征服慾)이 강했었나 보다.
모두 같은 가면을 씌우려고...
이곳은 철산4동 고지대의 끝자락.
고층건물과 저층건물의 대비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었다.
여기가 끝이구나, 하고 돌아가던 찰나에
못 보던 것이 숨어있었다.
끝자락으로 향할 땐 볼 수 없고, 되돌아 가려하면 보이는...
동물 친구들이 그려져있다.
그 땐 사자와 토끼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늘에서 쉬어 가실 할아버지 두 분을 생각하니 괜스레 실실 웃게 된다.
이곳은 마음을 여유로이 두어야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여유롭지 않으면 느낄 수도 없겠지.
머핀으로 치면 초코칩이려나?
밟고 있는 선인장이 더 아파 보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찍어보는 꽃들....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사진도 조금은 달리 찍히는 것 같다.
어릴 적 나를 떠올리고, 새삼 여유로움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조금은 다녀온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 아닐까.
벽화는 처음과 달리 사라진 곳도 있고, 흐려진 부분도 많았지만..
세월의 흔적이 남은 공간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무언가의 매력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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