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템포로 사랑을 하고, 이내 헤어지는 우리 사는 지금의 '쿨'한 사랑이야기.
흔히 말하는 인스턴트식 사랑이야기가 익숙해져 버린 2000년대를 살아가가면서도 그에 거스르듯 조금은 답답하고 느린 사랑을 보여주는 소설.
'은비령'
시원한 사이다 병을 따는 순간의 아쌀한 기분처럼 100일을 기념하고, 며칠 뒤에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이 빠른 시대에 은비령은 2천 5백만 년 후의 약속을 기다리는 여운을 주고, 그 여운조차 빠르게 지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2012. 2. 9 목요일 늦은 시간. 광명시평생학습원에서 '작가 이순원을 말하다. 소설이 만들어 낸 지명, 은비령'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주신 이순원 작가님을 만났습니다.
이날 제가 사회를 보는 기회를 얻은 덕에 따로 인터뷰 요청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조금 늦게 올리는 글이긴 하지만, 그때의 감동을 그대로 안고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광명에는 아마 처음이실 것 같습니다. 광명을 둘러본 소감과 강의를 듣는 광명 시민들의 반응에 대한 선생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네. 광명은 처음입니다. 광명에 대해서는 고속철도인 KTX가 유명하고, 시흥으로부터 분리된 지역이라는 것 외에 잘 아는 것이 없네요. 그러나 넓은 자리임에도 오늘 강의에 비교적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사실 놀란 것도 사실입니다. 시민들의 진지한 질문이 많았고, 상호공감하는 자리였기에 그랬습니다. 강연 내내 많은 분들이 집중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생각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인데요. 선생님은 배경으로 강원도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원도 전문 작가 이순원. 왜 하필 강원도입니까?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처럼 정서와 태생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지방의 한 지역을 주제로 쓰는 작가들은 많습니다. 정서와 태생이 결합되어 그만큼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것이 강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작가는 프랑스의 이야기를 보다 더 세밀하게 쓸 수 있습니다.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프랑스에 관한 이야기를 더 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뉴욕의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사람의 태생적인 세계가 바로 문학세계가 되고, 자기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서양작가들이 자신의 태생이나 생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여기는데 한국의 작가들이 그 태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왜 그것만 하느냐"고 합니다. 그렇다면 서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세계적인 것입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로서 가장 좋은 것은 자기의 이야기, 자신의 삶의 무대를 태생적인 생각의 뿌리로 여기고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태어난 저에게는 강원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많은 작품에서 ‘나’라는 시점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많습니다. 작품에는 태생적인 감성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런 작품들은 선생님의 개인 경험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제 작품 가운데 '19세(※ 한 소년의 열세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의 삶의 기억을 담은 성장소설)'를 보고, 조카들이 묻습니다. "이거 다 외삼촌 이야기야?"
큰 틀인 총론에서는 제 경험에 관한 이야기가 맞습니다. 하지만 소소한 이야기인 각론에서는 창작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험들에서 나온 에피소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버무립니다. 그렇게 보면 제 작품을 큰 틀로 볼 때는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이나 삶을 보면 ‘길’에 대한 이야기를 뺄 수 없을 겁니다. 은비령이나 바우길이 그렇고, ‘한국 길 모임’ 상임대표 경력이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길 위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드로망'이나, '로드무비'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은비령'이나, '강릉 가는 옛 길',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 강원도의 바우길 같은 곳을 걷는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제 삶의 ‘길’에 관한 이야기가 작품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현재 집필중인 장편도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길은 한 인생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길과 인생은 길과 문화가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길은 인생을 말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저는 ‘길’에서라야 생각이 깊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번 장편소설은 5살부터 시작되는 성장소설입니다. 길 위에서 만나고, 행동하고, 겪고, 사유하는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야기지요.
선생님 책을 읽다보면 책 제목이 예쁜 것들이 많습니다. 제목은 보통 어떻게 정하시나요?
책의 제목 역시 작품의 하나입니다. 저 역시 좋은 제목을 짓기 위해 노력합니다. 작품과의 연관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제목을 함축적이고, 대중적이게 그리고 격조 있게 하고 싶은 게 바람입니다. 또한 일정 부분 신비로워야 하기도 하고요.
즉, 전략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제목은 ‘딱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은비령’을 보면 천문학 등 여러 가지 학문이 나옵니다. 이런 정보들을 수집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을 거라 보여 지는데요. 작품의 구상이나 정보의 수집 기간, 집필은 기간은 어느 정도인지?
‘은비령’ 집필만을 위해 천문에 관한 정보를 모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혜성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기에 자연스럽게 천문에 관한 지식이 조금씩 쌓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내용이라 하쿠다케 혜성이 나올 수 있던 겁니다. 그리고 혜성에 관해 아마추어 천문가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 소설에 대한 느낌이 왔습니다.
실제로 글을 쓰는 기간은 짧았습니다. 한 보름 정도 걸린 것 같네요. ‘은비령’은 제가 그동안 생각하고, 경험했던 것들을 토대로 하다보니 좀 더 짧은 시간에 집필할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캐릭터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캐릭터는 어떻게 만드시나요?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캐릭터입니다. 캐릭터는 그냥 미남미녀로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매력인 아닌, 작품 속에서의 매력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로 신경질적인 사람이 일상생활에서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작품 안에서는 매력인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일상의 우호도가 아니라, 작품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글을 쓰다 보면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럴 때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기분전환으로 여행을 떠나시나요?
작가가 글을 쓰다보면 막힐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럴 땐 짧게 하루나 이틀 정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전환 한다고 해서 막혔던 것이 열리진 않습니다. 글이 막힌 것을 열기 위해서는 그 막힌 부분에 대해 정면승부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습작생들이 중간에 자꾸 글을 접는 이유가 바로 이 막힌 곳에서 정면승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작품이 반쪽짜리가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하루에 원고지 분량 1~2장만 쓰고 내려오는 경우도 있고, 하루에 15~16시간 앉아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승부해 나가야 한다는 거지요. 정면승부하지 않고, 산을 내려오는 것은 도피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막힘도 습관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중 강원도. 특히 강릉을 소재로 한 소설은 제게 조금 특별한 느낌입니다. 제가 이곳 ‘광명시’를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인데요. 특정 지역을 주제로 소설을 쓸 때 작품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지역의 분위기라든지, 어떤 노하우라든지.
특정 지역을 무대로 한 이야기들은 많습니다. 곡성군 등 여러 지역이 그렇습니다. 그럴 땐 의도적으로 서울과는 다른 무엇을 표현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광명은 KTX가 출발하는 곳이라는 부분이 매력적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신도시의 과정이라든지 이야기 거리는 많을 것 같습니다. 성남 산동네라든지,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양귀자의 소설을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KTX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네요.
말씀을 들어보니 광명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숙제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준비하시는 그 소설에 ‘광명’이 소재로써 등장 할 수 있을까요?
(웃음)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제가 일산에 살다 보니, 작품에 일산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백마이야기 라든지.
제 닉네임이 ‘닭큐’입니다. 그 소설에 ‘닭큐’도 등장할 수 있을까요?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20여 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순원 작가님과의 인터뷰는 은비령의 ‘나’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의 존재를 잊게 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직접 만나 뵌 작가님은 동네 형처럼 느긋하고 편안했고, 닭큐는 그런 형과 즐겁게 수다를 떤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작가님의 마지막 멘트는 닭큐를 설레게 했습니다.
“소주 한 잔 하실래요?” ^^
덕분에 이번 인터뷰는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시민필진의 인터뷰에 성실히 응대해 주신 이순원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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