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에 사는 시민들이라면 기형도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듣거나 접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25년 전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광명의 시인 기형도를 말입니다.
지난 6일 그를 추모하는 문학제가 광명시민회관 대강당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는데요. 기형도의 문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한 현장을 제리가 함께 했습니다.
일과를 마친 발걸음을 재촉해 부랴부랴 시민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이번 행사는 '어느 푸른 저녁의 노래'라는 주제의 추모행사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추모 문학제입니다.
저는 다소 일찍 도착했는데요, 와우! 아니 벌써~~? 긴 줄의 끝이 보이질 않네요.
늦은 시간인데도 그를 만나기 위해 한숨에 달려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장소에서 치렀던 역대 행사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운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형도의 마니아로서 마음이 참 뿌듯했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말을 걸고 싶었는데요.
긴 줄의 행렬 속에서 아직 앳된 모습의 소녀들을 발견하고는 얼른 말을 걸었지요.
학생(김혜은, 김아리영) : 저희는 안양에서 왔어요. 행사 소식은 친구들과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그 외에도 여기저기서 소식을 접할 수 있었어요.
제리: 와우~~ 먼 걸음을 했군요? 기형도 시인은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요?
학생 : 저희는 안양예고 문예 창작과 학생이라서 '시'에 대한 공부도 한답니다. 작년 여름 교과서에서 기형도의 시를 접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참 좋았어요.
제리: 기형도의 시가 어떤 점이 좋고 가장 좋아하는 시는 뭔가요?
학생: 그의 시는 모두 감명 깊어요.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경험적 내용이 많고 내용이 어렵지 않아 좋아요. 그중 가장 좋아하는 시는 '바람의 집- 겨울 판화 1'이라는 시에요. ^^
그녀들은 기형도의 시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기형도를 좋아하니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었답니다.
행사 시작 전 로비 이곳저곳에서 방송국 기자의 인터뷰 취재 열기와 끝없이 길게 늘어선 줄, 그리고 팸플릿을 미리 읽으며 기다리는 관객들의 모습에서 기형도에 대한 관심의 깊이와 추모제의 이슈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어요.
로비에서 한 시간여를 기다렸지만, 누구 하나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 없이 무사히 공연장 안으로 입장을 마쳤습니다. 역시 문화관람 수준이 높은 광명인들입니다. ^^
"와, 정말 많은 관객이 오셨네요. 기형도 시인의 인기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확신합니다." 정세진 아나운서의 사회로 추모 문학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선 관객들을 보며 놀라는 모습에서 기형도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답니다.
본격적인 순서 진행에 앞서 시에서 몇 년 전부터 기획하고 준비했던 '기형도 문학공원'조성과 '기형도 문학관' 건립 계획을 발표하였는데요. 그야말로 기형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오랜 염원이었죠.
기형도 기념사업회 회원을 비롯해 문학을 사랑하는 광명시민들, 아니 대한민국의 문학인들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에 이어 가슴 짠한 영상이 화면에 흘렀습니다. 이제는 초췌해진 육신의 노모가 이 세상에 없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노모의 목소리가 흐르는 동안 관객들의 눈시울은 뜨거워졌고 여기저기서 눈물을 찍어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평소 '어머니'라는 단어만 들어도 울어버리는 저는 자식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아픈 가슴이 감지되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말았어요. 이 세상에 없는 아들을 부르는 어머니의 서글픈 그 목소리에 울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이번 문학제는 기형도의 문학 세계를 춤과 이야기, 노래 및 시 낭송, 연극, 소설 낭독 등 다양한 장르로 연출되었습니다.
기형도 시인은 시 못지않게 산문을 뛰어나게 잘 썼으며 여행을 좋아했던 길 위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 첫 순서로 성우 김상현 님의 산문 낭독(서고사 가는 길)이 있었는데요. 귀를 기울이게 하는 고혹적인 목소리에 얹혀 그의 글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빛났습니다.
산문 낭독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 '도로시를 위하여 - 유년에게 쓴 편지'가 춤으로 연출되어 선을 보였습니다.
"기형도의 시 세계의 어둠과 밝음이 서로의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을 잘 표현한 것 같다."라는 진행자의 말처럼 몸으로 쓰는 입체적인 시였습니다. 이런 공연은 시를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닌 눈으로 보고 느끼는 또 다른 시 감상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죠?
공연에 이어 기형도와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의 기억을 통해 시인을 만나는 시간도 마련되었습니다. 소설가 성석제 님과 문학평론가 이영준 님이 들려준 기형도의 연세대 재학 시절의 이야기는 20대의 청년 기형도를 만나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도 했는데요.
진행자: 기형도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나시는지요?
성석제(소설가) : 문학 서클 일 학년 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말이 빠르고 겹치는 단어가 없이 말을 잘했으며 거의 연기자처럼 표현했어요. 준수한 외모와 가수 뺨치는 노래 솜씨에 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관심이 없었죠. 그래서 나한테 넘겨라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지요. 하하하
이영준(문학평론가) : 어느 해 정현종 교수의 시 창작 수업에서 기형도가 시 '어느 푸른 저녁'을 발표했는데 시를 접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단한 시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그 감동 때문에 신촌 시장통에 가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윤동주가 있다면, 20세기 후반에는 기형도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시인 기형도는 치열하고 뭔가 이루려는 노력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림도 잘 그렸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아까운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기형도의 젊은 날의 회고를 듣다 보니 마치 그가 옆에 살아 돌아온 것 같았어요.
그 분위기를 이어 뮤지컬 배우 배해선님의 목소리로 듣는 '밤눈'과 이어 부른 '하얀 목련'은 마치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목련처럼 3월에 태어났다 3월에 떠난 시인 기형도를 연상하며 부르는 노래 같았답니다.
지금 이곳에는 없지만, 자신의 시와 글이 이렇게 사랑받고 읽히고 때로는 위안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그 외에도 김행숙 시인, 황정은 소설가의 시낭독과 소설 낭독이 추모제를 함께 했는데요. 좀 긴 시간의 행사였음에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푹 빠져들었습니다.
또 기형도의 시 '내 인생의 중세'와 '위험한 가계'를 연극으로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 시에는 기형도 유년의 가계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몸이 아픈 아버지를 중심으로 누이들과 어머니 그리고 공부를 잘했지만, 상장을 개천에 띄워 보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소년이 나옵니다. 장사하는 어머니, 공장에 다니는 누이, 선생님께 가정방문을 하지 말아 달라는 소년 기형도.
광명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소하동 집터에 가면 어김없이 그림처럼 떠오르는 시 '위험한 가계'를 연극으로 만나니 마음은 더 어두워지더군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소년에게 아픈 가장을 둔 집안은 위험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지요.
문학제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 '엄마 걱정' '찔레꽃'이 울려 퍼졌습니다.
소리꾼 특유의 힘찬 창법 속에 기형도 특유의 시 세계가 잘 어우러졌지요. 온화한 미소가 인상적인 근사한 소리꾼의 목소리를 통해 기형도의 시가 빛났답니다.
공연장 로비에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들이 보여 다가가 어디서 오셨는지 물었습니다. 시흥에서 오셨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네요. 와우~~ 기형도 시인은 팬층이 참 두텁구나 하고요. 이분들은 기형도 시인 어머님의 지인분들이시라고 하는데요. 다리도 아프고 어쩌면 귀찮은 나들이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오신 걸 보니 기형도의 힘이 대단하죠?
어머님과 나란히 포즈를 취해주신 기향도(기형도 시인의 누님) 님도 먼저 간 동생 생각에 그리고 동생의 시에 대해 남다른 느낌으로 동생의 추모일을 채우셨을지 모릅니다.
비록 지금 우리 곁에 없지만, 영원히 살아있는 광명의 시인 기형도,
기형도의 문학을 다양한 예술 형태로 만나 본 문학제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이 문학관 완공의 날을 기다리는 새로운 설렘을 선물해준 기형도 25주기 추모 문학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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