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꽃향기를 벗어던진 길 위에 섰다.
그 길 위에 눈길을 사로잡지 못하는 표지판이 있다.
어지러이 돌아가는 이발소 싸인볼도.
둘은
세상일에 무관심한 길을 닮아있다.
익숙지 않은 이름을 곱씹어 본다.
새터안로 17번길.
무작정 따라가 보자.
길에게 길을 물으며, 그렇게.
아직은 우리가 알던 길 위에 있다.
콘크리트 냄새,
사람 냄새,
코끝에 살랑거리는 초록, 초록.
길을 재촉한다.
공주 다롱, 얼짱 찬희, 우정해♡
친구 사이일까 ?
이 골목에 살았을 친구들을 기억하는
빨간 벽이 말했다.
보. 고. 싶. 다.
허물린 건물을 기억하는
대문 너머의 세상이 궁금하다.
더위에 늘어지는 시간처럼 느리게 말해본다.
조금만 기다려. 만나러 갈게.
낯선 곳에 온 듯하다.
시간을 붙잡아 두려는 듯
대롱거리며 매달린 빨래집게,
야트막한 슬레이트 지붕,
텃밭.
산골인 양 착각에 빠지게 하는 이곳은
새터안로 17번길 위에 있다.
널어놓은 시래기가 교회 앞마당을 베게 삼아
해바라기 하고 있다.
또각이는 내 발소리에도 미동조차 없더니
스치는 바람에 뒤척인다.
햇살, 이불을 살짝 덮어주고 웃는 5월.
솜씨 좋은 농부가 뿌려놓은 씨앗은 벌써 싹을 틔웠다.
산자락을 일구어 놓은 모양이
이가 하나 빠진 사내아이처럼 개구지다.
아이들이 오르내렸을 소나무는
이제 허리가 굽었다.
밭에서 나온 돌로 쌓아졌을 돌탑,
한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듯 한 샌드백과 그 아래 평상까지
어느 것 하나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다.
사람의 흔적이다.
이곳에 주차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산자락에
주차금지 표지판이 있다.
도심 주택가의 낯익은 풍경과 텃밭의 조화. 아이러니.
혼자 담배를 피우시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언덕 아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
문득 드는 생각 하나.
개발이 되고 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이럴수가!
초록에 점령당한 모습에 감탄하고 만다.
사람, 집, 길, 모두 녹음 속 풍경일 뿐
본연의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지난 겨울 건즈맘이 연탄배달 봉사를 했던 곳.
뜨거웠을 그들에게 열기를 빼앗겨버린 연탄은
부서진 잔해들만 남아 뒹굴고 있다.
한 때 누군가에게 뜨겁게 열정을 불태웠을...
녹음과 연탄 열기에 취해 정신을 잃었었나.
발길을 돌려 돌아보니
할아버지는 아직도 풍경처럼 그 자리다.
나는 아직도
새터안로 17번길 위에 있다.
등산객들이 세워놓은 자동차 위로
외로움 때문인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탓인지,
슬픈 곡예사처럼 솟아있는 길 위에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연속이다.
시멘트길을 지나고, 흙길을 지나 오르다 보니
조성되다만 공원 입구는 다시 시멘트 길이다.
아찔하게 쏟아지는 녹음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길은 또 다른 길을 품고 있기도 한다.
어느 한쪽은 잠시 잊어야 하는 선택의 순간.
길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려는가.
그럴 때면 우리,
길에게 길을 묻자.
어느새 꽃향기를 벗어던진 길 위에 섰다.
그 위로 흩날리는 녹음,
참으로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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