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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소통/소소한 일상

정치에 正治를 바라다. -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을 만나다.

 

 

오늘은 제 18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던 날입니다. 새로운 정부 출범과 함께 새로운 관리들도 많이 배출이 되었죠. 이런 시점에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 선생의 기념관을 찾아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오리 이원익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광명이 낳은 위인이라 할 수 있는 오리 선생의 기념관은 광명시청에서 광명 KTX역으로 가는 도로 변 소하동에 자리하고 있어요. 소하동은 오리선생의 종가와 묘소 등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리 이원익 기념관인 오리관은 기존의 기념관이 유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게 구성 되어 있었어요. 만화와 그래픽 등 다양한 패널을 설치해 이원익 선생의 생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했습니다. 그리고 오리 선생을 지방관, 임진왜란의 활약, 대동법을 시행한 정책가, 청백리한 인간의 면모 등 오리 선생을 다양한 스토리로 풀어 설명 했더라구요.

 

참 오리이원익 기념관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을 하고 매주 월요일에 휴관을 한다고 합니다.

 

 

오리이원익기념관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청백리 정신과 충효 정신을 널리 알리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며, 사회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2001년 5월 10일 개관하였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광명문화원에서 위탁 관리하였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재단법인 충현에서 위탁 관리하였다. 2010년부터 광명시청에서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다.


 대지 면적 5,504㎡, 총면적 1,128.60㎡로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이다. 전시실, 교육용 강당, 유물보존실, 사무실, 화장실, 기타 부대시설로 이루어졌으며 전시
실에는 이원익의 유품과 이원익의 4세손 이존도(李存道), 5세손 이인복(李仁復)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오리이원익기념관 외부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85호인 이원익 선생 묘 및 신도비가 있다.


 오리이원익기념관은 오리 이원익 관련 자료의 연구·수집·보존·관리·전시를 주요 업무로 하고 있다. 이 밖에 이원익의 청백리 정신을 선양하고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한 사회 교육, 관내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과 주민을 대상으로 역사 현장 체험 교육을 하고 있다. 광명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 근무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과 신정·설 연휴 기간에는 휴관한다. 관람료와 주차료는 무료이며 관내로 음식물을 들여올 수 없고 애완동물도 출입할 수 없다.

 

출처: 디지털광명문화대전

 

 

 

 

 

 

먼저 기념관 입구 정면에 사본이긴 하지만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선생의 초상화는 6점이 전해지고 있고 그 중 3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잘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 후손들의 선조 사랑이 참 대단한 거 같죠?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선생의 연표가 그려져 있어 슬슬 걸어가면서 선생의 일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선생의 일대를 살펴 보면 오리 이원익 선생은 1547년(명종 2년)에 태어나셔서 1634년(인조 12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또 이원익 선생은 살아 계시는 동안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하셨다고 해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을 두 번이나 하셨다니 선생의 청렴한 관리로서의 자세와 인품을 알 수 있습니다.

 

 

※ 오리이원익선생의 모든 정보는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충현박물관 홈페이지

 

 

 

전시관은 많은 이야기들을 만화로 풀어내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편안하게 오리 선생과 조선의 역사를 배울 수 있을 거 같아요.

 

 

 

 

 

특히 오리 선생은 애민사상에 투철해 안주목사로 재직 시에 뽕나무를 심어 백성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었다고 합니다.

 

관리가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선생의 애민사상을 지금의 관리들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었던 선생은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을 세금으로부터 부담을 덜어 주었다고 합니다.

 


대동법: 조선시대에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은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를 재청하여 1608년 5월에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할 것을 명하고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9월부터 실시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오리 이원익 선생은 관리 생활을 할 동안 번듯한 집 한 채 없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청렴결백하게 관리생활을 했으면 집 한 채가 없었을까.

 

1624년 선생의 연세 78세일 때 인조가 집을 하사 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선생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청백리의 표본이 되시지 않았을까요?
 

 

출처: KBS


 

 

 

전시관에는 오리 선생이 정몽주의 시를 쓴 액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유상종이라 할까요? 고려 말 혼란기의 충신과 조선 중기의 난국 속 충신. 세월을 뛰어 넘어 함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글 쓰기를 좋아하는 선생이 손자에게 써 준 시입니다.

 

"홀로 누각에 앉아 팔도를 바라보니 검은구름 흩어지고 달 그림자 외롭다 망망한 우주 무수한 사람 중에 몇 명의 사나이가 대장부인가"


시에서 선생의 손자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오리선생은 충무공 이순신과도 인연이 깊다고 합니다. 원균의 모함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난 이순신을 선조로 하여금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게 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임진왜란 기간동안 오리 이원익은 이순신을 변함없이 옹호한 거의 유일한 대신이었다. 유성룡마저 이순신을 비판할 때도 이원익은 "경상도의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면서 그를 교체하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네이버캐스트- 이원익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선생은 관리로서도 위대하였지만 가정에서도 자상한 어른이셨습니다. 손자 수약에게 쓴 글에서는 선생이 평생 해왔던 관리로서의 자세와 삶의 방법을 상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냈지만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는 다정합니다. 선생의 이런 따뜻한 마음이 백성들도 사랑하게 하였을 것 같습니다.

 

 

 

 

 

정부가 새 대통령을 맞이하는 준비로 바쁜 시기에 찾은 오리 이원익 기념관.

 

오리 선생은 88세까지 장수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60세를 살기가 어려워서 60년 산 것을 축하하는 회갑연을 하는 게 큰 행사였는데 오리 선생은 상당히 장수를 하신거죠.
 
새 정부에서 새로운 관리로 일하실 분들도 오리선생의 마음가짐을 따르다 보면 장수를 하지 않을까요?

 

그 분들에게 오리 이원익 선생의 청렴함과 정직한 정치를 기대해 봅니다.

 

 

 

글·사진 | 렌즈로 보는 세상(김분호)

온라인 시민필진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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