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엷은 졸음처럼 스며들고 있다.
아직 푸르디푸른 이파리 사이로
은행알은 스르르 노랗게 가을빛을 머금기 시작한다.
이제 여름의 뒤꼭지는 멀어져 이파리 색깔의 농도를 변화시킨다.
나비의 날개 위에도 가을은 묻어 있는 듯하다.
여릿 여릿 걸어오는 가을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광명 마을 탐방에 나섰다.
중앙도서관을 지나 조붓한 길을 걸어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서면,
아직은 자연 풍경이 많이 남아 있는 '삼리마을'이 나타난다.
언덕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니
수령이 300여 년이나 된다는 회화나무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마치 마을의 수호신 같다.
여름 햇볕을 몸에 들이고
안으로 안으로 단단히 제 세계를 둥글게 만들어가는
호박 하나가 카메라를 붙든다.
그 호박이 지켜보고 있는 마을 쉼터에서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 이 마을에 사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한 40년 됐지."
"이 마을은 어떤 점이 좋은가요?"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 공기가 좋아.
저녁마다 놀러 나오는데 참 좋아."
라고 말씀하시는 어르신(70세).
공기 좋은 마을에 사는 덕분인지 얼굴빛이 참 건강해 보인다.
마을 쪽으로 더 들어가니 가을에 한 발짝 더 다가간 풍경이 펼쳐져 있다.
갈 빛 도토리와 햇살 빛 닮은 고추가 고슬고슬한
9월의 햇볕 아래 몸을 뉘고 있다.
"할아버지 높은 연세에 비해 참 건강해 뵈시네요?" 너스레를 떠는 내게
"뭔 소리여~~, 100살도 안됐는데 뭐 나이가 많다고 그랴? "하신다.
이 마을 최고 어르신인데 90세의 연세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일을 즐겨 하신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안 보이고 남자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나타나시더니
도토리 껍질 까는 일을 능숙하게 하셨다.
이 마을에서는 도토리묵을 쑤어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는데,
공장에서 만들어진 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라며 자랑이 푸짐하시다.
"도토리가 가루는 적게 나도 맛은 그만이야."
할아버지는 벌써 맛있는 묵을 잡수신 듯하다.
어느 마을이나 사람이 모이는 광장 같은 곳이 있을 텐데
삼리마을의 광장은 이 가게의 앞 마당인듯 했다.
마당 앞에는 여주 넝쿨이 풍성했는데 여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여름내 수없이 따서 마을 사람들과 나누었다며
자랑하시는 아저씨의 얼굴에 나눔의 기쁨이 번져갔다.
여주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상하고 있는데
대문 안쪽에서 이리 와 보라며 정겹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서니 지금 막 만든 두부라며 먹어보라고 권하신다.
따끈따끈한 두부를 방금 버무린 겉절이에 얹어 먹는데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다.
"오우~~ 이런 횡재를 하다니~~~
김치가 커서 잘 먹지 못하자
할머니가 투박한 손으로 쭉쭉 찢어 내 젓가락 위의 두부에 얹어 주신다.
"내 손녀 같어~~맛있제? 많이 먹어, 더 먹어~"
간판이 따로 없어 몰랐는데 이 가게는 식당을 겸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연탄이 쌓여 있다. 아직 연탄을 사용하는 마을이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고생한 기억은 한 두 번쯤 있지만
그마저도 그리운 시절의 한 페이지로 남은 지금, 연탄이 반갑기도 하다.
이 마을 또 하나의 희귀하고 예쁜 풍경은 제비집이다.
위를 올려다보니 정성으로 진흙을 물어다 지었을 제비집이 보이는데
주인아저씨는 저 제비집에서 새끼를 세배나 냈다고 자랑하신다.
전래동화 '흥부 놀부'에 나오는 제비 집도 이렇게 지었을까?
마을의 구석구석을 거닐며 만난 풍경은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한다.
오래된 마을의 한 식구인 듯한 풍경들은 정겹기만 하다.
어릴 적 마당 한편 우물가를 지키던 봉숭아가 생각나 가까이 다가가 카메라를 열었다.
저 뒤편의 고추나무를 보호라도 하는 듯 도열해 있다.
가을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꽃이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
는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어느 집 마당 안쪽에 피어 담장 넘어가 궁금한 양
고개를 내민 해바라기들도 과꽃을 보고 있다.
저 정겹고 소박한 삼리마을 길을 따라
가을은 저 김장 배추밭에도 성큼성큼 걸어오리라.
아직 문명의 발걸음이 깊이 침범하지 않은
광명의 몇 마을들 중 하나로 남아있는 삼리마을.
이렇게 자연이 사람과 함께 숨 쉬고 있어 좋다.
아저씨가 바라보는 저 앞에는 논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지금은 변전소가 있고 전깃 줄이 얼기설기하다.
아저씨는 35년여 전의 삼리마을 모습이라며 귀한 사진 하나를 보여 주셨다.
저 앞이 다 논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다며 아쉽고 그리운 눈길을 보인다.
높은 건물들과 복잡한 교통으로 숨이 막히는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만날 수 있는 이곳 '삼리마을'.
언제부턴가 들어선 공장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로 인해 마을 경제에 보탬은 되겠지만
마을의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래도 마을 외변에는 흙냄새 꽃향기 정겨운 모습들이
남아 있어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그리움이 아직 남아 흐르고 있는
'삼리마을'로의 작은 여행이 흐믓하다.
글·사진|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 제리(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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