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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소통/사람사는 이야기

생명이 충만한 그곳의 뜰을 밟다. - 중앙도서관 주최로 가족문학탐방단 45명이박경리 문학공원을 찾다.

 

 

강원도 원주는 높직한 산들이 겹겹으로 포개져 있는 곳이다.

군인 도시의 성격이 짙었던 이곳을 문학의 도시로 만든 이가 바로 소설가 박경리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 <토지>는

1994년 광복절 새벽에 이곳 원주에서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었다.

 박경리 선생이 18년간 살면서 소설을 완성한 옛집과 주변은

이제 박경리 문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쏟아질 듯한 장맛비가 한참이나 뜸을 들이는 7월,

 광명 중앙도서관이 주최한 가족문학탐방단 45명도 이곳을 찾았다.

참여한 가족은 모두 열세 가족, 무려 10:1의 경쟁을 뚫은 행운의 가족들이다.

 

엄마, 아빠와 함께 온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생이다.

이 아이들이 과연 박경리나 <토지>를 알고 있을까?

 

중앙도서관이 집과 가까워 좋다는 손지영씨는

 "아이들이 어릴 때는 (데리고 나갈 때) 준비할 것이 많아 다니질 못했는데,

이제 애들이 초등학교 3, 5학년이라 신청하게 되었다."며

"박경리 소설가와 <토지>에 대해 얘기해 주긴 했지만,

아이들이 잘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원주로 가는 길, 도로는 막혔지만,

박경리 선생이 이룩한 문학 세계를 찾는 마음은 모두 기대로 열려 있는 듯했다.

 

 

 

 

 

본래 원주는 닥나무밭이 많고 맑은 물이 흐르기에 '한지의 고장'으로도 알려졌다.

한지테마파크부터 들르고,

아이들은 한지 공에 체험실에서 육각 필통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풀칠하는 아이들의 손길이 예술이다.


가족들이 탐방을 통해 가까워지도록 해보겠다는

중앙도서관 주무관의 말씀도 있었는데 바로 그 현장을 보는 것 같다.

 

 

 

 

 

이럭저럭 정오를 넘긴 시간이 되었다.

탐방의 즐거움은 역시 음식, 강원도에 왔으니 강원도 음식이 제격일 것이다.

 

 

 

 

 

소박해 보이는 식당에서 문학탐방 가족들이 먹은 것은

감자옹심이 메밀칼국수와 메밀막국수다.

 

특히 칼국수는 들깻가루를 듬뿍 넣고, 투명한 감자옹심이가 알알이 빛났기에

이렇게나 맛있는 건 처음이라고 이구동성! "잘 먹었습니다!" 인사가 절로 나온다.

 

 

 

 

 


드디어 원주시 단구동 박경리 문학공원에 도착했다.

 

1980년 사위인 김지하가 투옥되고 외동딸 영주씨가 큰 손주를 낳고 힘겨워할 때

박경리 선생은 딸의 시댁인 원주로 내려왔다고 한다.

당시 원주에서도 변두리였던 이곳은 지금 제법 번화한 곳이 되었다.

삼천여 평의 문학공원은 박경리 선생의 옛집과 뜰,

박경리 문학의 집과 북 카페, 주변 세 개의 테마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문학 탐방단이 북카페쪽으로 들어서고 있다.

박경리 문학의 집 5층 세미나실에서 선생의 문학 세계를 보여주는

16분짜리 영상물을 먼저 보았다.

 

<토지>를 쓰기 위해 완전히 단절된 가시밭길 삶을 살았던 선생은

'외로워야 자유롭다. 절대 자유 속에서만 창조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사랑 중에서도 가장 밀도가 짙다는 연민'의 마음으로 <토지>를 쓸 수 있었다.

 

 

 

 

 


(박경리 선생이 초등학교 시절 엄마와 찍은 사진)

 

원래 이름은 '금이'였고 '경'리라는 이름은

등단을 추천했던 김동리 선생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금이는 내성적이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행복하고 평탄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선생의 말처럼

굴곡진 삶이 "기막히게 고달픈 직업"인 소설가의 길로 선생을 이끌었다.

 

가족문학 탐방에 초등학생이 많아서일까?

사진 속 금이처럼 탐방단 아이 누구라도 훗날

무한한 가능성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의 집을 나와 선생의 옛집으로 가는 길)

 

바닥의 돌들은 선생이 손수 원주천에서 주워와 집 현관 앞까지 깐 것이라고 한다.

 

 

 

 

 

(선생의 옛집 앞뜰에 있는 조각상)

 

선생이 텃밭을 가꾸다 앉아서 쉬며

치악산 줄기를 바라보던 바로 그 자리에 조각상이 세워졌다.

아이들이 친근한 할머니라도 대하듯 얼굴도 만지고, 치마폭에 앉아보기도 한다.

  

"내 뜰은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선생의 말은 무슨 뜻일까?

생명의 근원이 되는 토지를 소설 제목으로 삼고 만 25년을 써내려갔을 뿐 아니라,

토지를 가꾸며 온 우주에 충만한 생명을 느끼며 사셨던 것은 아닐까?

 

 

 

 

 

선생의 집 거실에 다 같이 앉아 잠시 더위를 식혔다.

 

해설사는 선생이 토지를 쓰게된 계기와 이곳에서의 삶,

첫 손주인 원보에 대한 애정 등 다양한 얘기로

가족문학탐방단이 선생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선생의 집필실은 그야말로 성역이었다.

생전에 선생은 아무리 친한 이라도 이곳만큼은 들이지 않았으며,

시장에 생선 한 마리를 사러 가도 문을 잠글 정도로

철저하게 <토지>와 마주하는 공간으로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선생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이곳은 여전히 선생의 치열함을 간직한 공간으로 찾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광명으로 출발하기 10분 전, 선생의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이곳에 온 인연과 가족의 추억을 남기려는 한 가족의 모습이 살짝 진지해 보였다.


 

 

 

 


(오후 세 시의 여름 햇살 속에 고즈넉한 박경리문학공원)

 

저 멀리 보이는 박경리선생 옛집의 뒷모습과 함께 떠나는 아쉬움에 찍어보았다.

 

광명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오늘의 탐방 소감을 들어보았다.

"<토지>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엄마의 말과

"박경리 선생의 천재성을 엿보았다."는 아빠의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역시 초등학생들답게

"박경리 선생이 기르던 거위가 보고 싶다.",  "집이 넓고 좋았다."고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늘의 탐방 효과를 의심케 하는 발언들이긴 했다.

 

그래도 한국문학의 거목인 소설가 박경리와 대하소설 <토지>는

확실하게들 알고 가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 생명이 충만한 뜰을 밟았던 이 아이들에게

뿌려진 체험의 씨앗이 언제 어떻게 꽃을 피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글·사진 | 온라인 시민필진 바다연꽃(옥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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